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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깨달음☞/☆ 깨우치는 한마디

도행역시 倒行逆施 & 일모도원 日暮途遠

by 맥가이버 Macgyver 2020. 12. 6.

 

도행역시 倒行逆施

 

풀이

거꾸로 도 · 갈 행 · 거꾸로 역 · 베풀 시

 

거꾸로 가고 거꾸로 행하다.

도리를 따르지 않고 무리하게 행하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출전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보필하여 패자로 만든 오자서(伍子胥)의 집안은 원래 6대에 걸쳐 초()나라에 충성을 바친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신하였다.

당시의 초평왕에게는 건()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평왕은 오사를 태자 건의 태부(太傅), 비무기(費無忌)라는 사람을 소부(少傅)로 임명했는데, 비무기는 태자 건에게 불성실했다.

 

얼마 후, 평왕은 태자비를 진()나라에서 맞아 오기 위해 비무기를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 공주가 미인인 것을 본 비무기는 말을 달려 돌아와 진나라의 공주를 태자에게 주지 말고 평왕이 취할 것을 건의했다.

 

평왕은 진나라 공주를 가로챘으며, 그녀를 더없이 사랑하여 아들 진()을 낳았다.

태자에게는 따로 비()를 맞아 주었다.

이 공로로 비무기는 평왕을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평왕의 사후가 걱정이었다.

태자가 왕이 되면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므로 겁이 난 나머지 태자 건을 중상하기 시작했다.

평왕은 차츰 태자 건을 멀리하더니 마침내는 변경인 성보(城父) 태수로 임명하여 국경을 지키게 했다.

 

비무기는 계속해서 태자가 진나라 공주의 일로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왕에게 참소했다.

평왕은 비무기의 참소에 넘어가 즉시 태자의 태부인 오사를 불러들여 사실을 추궁했다.

 

오사는 비무기가 태자를 왕에게 참소한 것을 알았으므로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참소로써 사람을 해치려는 소인배의 말을 믿으시고 친자식을 멀리하려 하십니까?”

 

목숨을 걸고 태자를 제거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비무기는 필사적으로 나왔다.

왕께서 지금 당장 이를 못 하도록 누르시지 못해 일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결국 포로가 되실 뿐입니다.”

 

평왕은 즉시 오사를 옥에 가두고, 성보의 사마(司馬, 군정관(軍政官))인 분양(奮揚)에게 태자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분양은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태자에게 사람을 미리 보내 도망치라고 알려 주었다.

태자 건은 송()나라로 도망했다.

 

태자를 내쫓은 비무기는 다음 차례로 오사 일가를 지목했다.

오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현명합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초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비를 인질로 잡아 그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초나라의 화가 될 것입니다.”

 

왕은 옥중의 오사에게 두 아들을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다.

물론 불러들이면 오사의 목숨을 살려 준다는 조건이었다.

오사가 거절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불렀다.

큰아들 오상이 가려 하자 작은아들 오자서가 말렸다.

 

초나라에서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가 떠나가 후환이 될까 두려워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우리 둘을 불러들이려는 것입니다.

가는 날이면 부자가 함께 죽고 말 뿐, 조금도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가면 아버지의 원수마저 갚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로 달아나 힘을 빌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만 못합니다.

부자가 함께 죽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오상은 동생 오자서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아버지와 함께 죽기 위해 자진해서 옥에 갇혔다.

오자서는 도망쳐 송나라에 있는 태자 건에게로 갔다.

오상이 수도로 호송되자 평왕은 오사와 오상 부자를 함께 처형해 버렸다.

 

오자서가 송나라에 도착한 직후에 송나라에서는 때마침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정()나라로 달아났다.

정나라에서는 태자 건을 극진히 예우해 주었으나, 정나라는 작은 나라라서 힘이 되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태자 건은 진()나라로 떠났다.

 

태자 건이 정나라와 친한 사이로 정나라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진경공(晉頃公)은 그를 이용해 정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태자 건을 꼬드겼다.

진경공은 태자 건이 안에서 내응하고 진나라가 밖에서 공격하여 정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곳에 태자 건을 봉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태자는 욕심을 품고 다시 정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그의 종자가 정나라 조정에 이 음모를 고발해 버렸다.

어떤 일로 태자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자신이 살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정나라에서는 태자 건을 주살하고 말았다. 오자서는 건의 아들 승()을 데리고 허둥지둥 오()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국경 지대에 이르러 관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쫓겼으므로 할 수 없이 승과 헤어져 혼자 도망했다.

추격자에게 쫓기던 오자서는 가까스로 강수(江水)에 이르러서 한 어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자서는 오나라에 들어섰으나 도성으로 가는 도중에 혹은 병에 시달리고, 혹은 걸식을 하는 등 심한 고생을 겪었다.

오자서는 장군인 공자 광()을 통해 오왕 요()를 알현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양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고을이 함께 누에를 치고 있었는데, 양쪽 여자들이 뽕 때문에 시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두 고을이 서로 공격을 했고, 이것이 양국 간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오나라는 공자 광을 시켜 초나라를 치게 했다.

공자 광은 국경 지대 일부 고을을 함락시킨 다음 돌아왔다.

오자서는 오왕 요에게 이 기회를 타 공자 광을 보내 초나라를 계속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공자 광은 오자서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와의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전쟁을 반대했다.

이런 공자 광의 반응을 보고 오자서는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공자 광이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지금은 외부의 문제를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오자서는 전저(專諸)라는 자객을 공자 광에게 천거하고, 자신은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5년 후 초평왕이 죽었다. 그리고 앞서 태자비가 될 뻔했다가 평왕의 비가 된 진나라 공주의 아들 진()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그가 곧 소왕(昭王)이다.

오왕 요는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두 아우를 시켜 초나라를 기습 공격하게 했다.

 

오나라의 군대가 초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하여 국내가 텅 비다시피 되자 공자 광은 자객 전저를 시켜 오왕 요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오왕 합려이다.

합려는 즉시 오자서를 불러들여 행인(行人, 외교 고문)에 임명하고 함께 국사를 꾀했다.

 

합려 9(BC507), 오자서에게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왔다.

합려가 오자서, 손무 등과 상의를 통해 대대적으로 초를 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합려는 먼저 초나라의 속국이면서도 초나라와 원한 관계가 깊어진 당() · ()와 연합하고, 국내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로 쳐들어갔다.

 

오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했다.

소왕은 수도 영을 탈출하여 도망했다.

오자서는 소왕을 잡으려고 했지만 소왕이 탈출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대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3백 번이나 매질을 한 후에야 그쳤다.

 

산중으로 피난 갔던 초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말했다.

그대의 복수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사람의 수가 많으면 하늘을 이길 수 있지만, 하늘이 결정을 내리면 사람을 깨뜨릴 수 있다고 들었소.

그대는 옛날에는 평왕의 신하로서 몸소 북면하여 그를 섬겼는데 이제 죽은 사람을 욕보였으니, 어찌 천도가 없는 것의 극이 아니겠는가?”

 

오자서가 말했다.

부디 신포서에게 잘 전해라. 해는 지고 길은 멀기 때문에 갈팡질팡 걸어가며 앞뒤를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고.”(及吳兵入郢, 伍子胥求昭王, 旣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尸, 鞭之三百, 然後已. 申包胥亡於山中, 使人謂子胥曰, 子之報讎, 其以甚乎. 吾聞之, 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今子故平王之臣, 親北面而事之. 今至於僇死人. 此豈其無天道之極乎. 伍子胥曰, 爲我謝申包胥曰, 吾日暮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그 후 신포서는 진()나라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를 부흥시켰고, 오자서는 오왕 합려가 죽은 후에 그 뒤를 이은 부차(夫差)와 틈이 벌어져 부차가 내린 칼로 자결한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나오는데

오자서가 한, 거꾸로 가고 거꾸로 행한다는 말에서 도행역시가 유래하여,

도리를 따르지 않고 무리하게 행하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일모도원(日暮途遠)’도 유래했다.

 

 

용례

 

학교에서는 법을 지키며 도덕과 양심에 따라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치지만,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면 도행역시가 만연한 세상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재빨리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사는 것은 각주구검에 다름이 아니어서,

결국 사회생활에서 실패하기 쉬울 것이다.

 

글 : 김성일

 

출처 : 고사성어대사전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몸은 늙고 쇠약한데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많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즉,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상황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