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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계종주 1·2] 시계(市界) 걸으면 역사가 보인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3. 14.

[서울시계종주 1·2] 시계(市界) 걸으면 역사가 보인다

 
1구간, 워키힐~아차산~태릉까지…삼국시대 고분·보루, 공원묘지 등 거쳐
      2구간, 태릉~불암·수락산~도봉산역… 불암산성 등 유적·사연 많아

서울시가 언제 지금의 행정구역 경계를 갖췄을까? 서울시계를 잇는 경계는 그 길이가 모두 얼마나 될까? 몇 개의 산을 넘을까? 또한 강이나 하천은 얼마나 될까? 그 경계를 따라 어떤 유적이 있으며, 무슨 역사를 말하고 있을까? 1000만 인구가 매일 생활하는 서울이지만 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이에 월간산 취재팀은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총 138㎞에 달하는 서울시 경계를 10구간으로 나눠 매월 둘째, 넷째 주 화요일에, 즉 한 달에 두 번씩 끊어 종주한 기록을 다섯 달간 연재할 예정이다. 다섯 달 연재하는 동안 구간 소개뿐만 아니라 그 구간에 포함된 서울의 모든 역사도 아울러 소개할 계획이다. 서울의 역사와 함께할 서울시계종주 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서울시의 행정구역이 지금 모습을 갖춘 건 불과 30년도 채 안 된다. 조선시대까지는 4대문 안이 서울이었다. 즉 서울 내사산(內四山: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따라 축성된 서울 성곽이 서울의 경계였다. 그러던 서울이 해방 전후로 점차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 한북정맥 수락지맥으로 서울과 경기도의 자연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형을 불암산 정상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도시를 가린 운무는 마치 산을 바다에 우뚝 솟은 섬으로 보이게 했다.

서울에 구(區)의 개념이 도입된 건 일제 말기인 1943년 3월 19일 공포된 조선총독부의 부령 제163호에 따라 종로, 중, 동대문, 용산, 성동, 영등포, 서대문 등 7개 구로 나뉜 때부터였다. 해방 직전인 1944년 11월에 마포구가 신설돼 8개 구로 해방을 맞았으나 1949년엔 시·도 관할구역의 명칭, 위치, 변경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 숭인면, 은평면 등 45개 리를 서울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성북구를 신설하면서 총 면적 268㎢로 광복 당시의 2배로 커졌다.


1943년 처음 구(區) 개념 도입


1975년엔 강남구를 신설하면서 다시 경계가 대폭 늘어났고, 1995년엔 강북·금천·광진구를 신설하면서 지금의 25개 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 서울의 행정구역과 인구는 총 25개 구, 522개 동, 605㎢에 약 1000만 명이 살고 있다. 해방 당시보다 두 배로 커진 1949년보다 면적만 약 3배 늘어난 규모다. 시청을 중심으로 직경은 약 40㎞ 내외이며, 둘레 길이는 총 138㎞에 달한다.


이 둘레 길이를 10구간으로 나누면 평균 14㎞ 정도 된다. 산과 강을 넘고 도로를 따라 때로는 평지로, 때로는 산길을 따라 간다. 1구간을 마치고 경상도 친구들을 만났다. “서울시계종주를 하고 왔다”고 하니 “서울에 씨게 종주할 산이 어디 있냐”고 대꾸해 한바탕 웃었다. ‘씨게’는 경상도 사투리로 ‘세게’ 혹은 ‘강하게’를 뜻하는 말이다.


▲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룬 수락산 능선으로 일행이 종주하고 있다.

서울시계종주는 구간에 따라 ‘씨게’도, 약하게도 걷는다. 1구간은 GPS로 측정한 거리가 18.3㎞에 달했지만 야트막한 산과 평지로 걸어 그렇게 힘들지 않은 코스였다. 하지만 2구간은 15,6㎞로 1구간보다 거리는 짧았지만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불암산, 수락산을 넘어서 도봉산 입구까지 걸어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더 지쳤다. 1, 2구간별로 서울시계종주길을 따라가 보자. <원색부록지도 참조>


[1구간] 광나루~아차산~용마산~망우산~구릉산(검암산)~태릉 담터고개 18.3㎞


지하철 광나루역에서 서울시계종주 출발이다. 거인산악회 이구 대장과 54트레킹동회 회원 20여 명이 모였다. 인원을 체크한 뒤 각오를 다지며 일제히 “파이팅”을 외쳤다.


출발지인 광나루는 아차산 남쪽에 있는 나루터로, 한강을 건너 충청·강원·경상도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조선 태종 때 별감을 파견할 정도로 요충지로 발전했다. 지하철 광나루역에서 한강 광나루까지는 복잡한 도로를 몇 개 건너야 하는 관계로 그냥 멀찌감치 보기만 하고 지나쳤다.


▲ 운무 속으로 솟은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가 저 멀리 보인다.
 도시는 운무 속에 완전히 잠겼다.

위커힐을 왼쪽에 두고 구리로 가는 46번 국도 옆 조그만 길로 아차산으로 접근하기 위해 걸었다. 바로 옆으로 차들이 쌩쌩 지나쳤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정확히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찾아가는 길이지만 여러 명이 걷기엔 길이 좁아 다소 위험했다.


모두들 걷는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1954년생으로 구성된 54트레킹동호회 회원들은 대부분 중년의 아주머니들인데도 걷는 품새가 가볍고 빠르다. 그 틈에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워커힐은 지금은 호텔로 바뀌었지만 한국전쟁 때 국군과 인민군의 격전이 벌어진 아차산 일대에서 전사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서 휴양지를 지은 데서 출발했다. 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기 위한 많은 피란민이 큰 희생을 치렀던 곳이기도 하다. 


▲ 일행이 수락산 하강바위를 넘어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어느덧 구리로 접어들었다. 왼(서)쪽 아차산으로 가는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200m 남짓 갔을까. ‘고구려대장간마을’이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나왔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자명고’와 영화 ‘쌍화점’ 등을 촬영했던 곳으로, 요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철기문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대장간’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옆에 있는 유적전시관엔 고구려 유물이 전시돼 있다. 입장료를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씩 받고 있다.

 

워커힐은 전사한 美 장군 이름 딴 휴양지


잠시 대장간마을로 들어가 취재하는 사이 일행이 전부 사라지고 없다. 아직 녹지 않은 길을 부리나케 뛰어올라갔다. 겨우 뒤꽁무니를 찾았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팀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54트레킹동호회는 백두대간을 두 번씩이나 종주한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 정도 내공인데, 어찌 감히 따라갈 수 있겠나. ‘오늘 고생 좀 하겠다’ 싶었다.


이젠 아차산 올라가는 길이다.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었다. ‘←아차산성·1보루, 큰바위얼굴·전망대→’로 나뉜다. 우린 아차산성 방향이다. 시경계는 위커힐로 올라가야 하나 워커힐 주변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구리 쪽으로 둘러온 셈이다. 


아차산(峨嵯山·286.8m)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이 한강을 앞두고 끝나기 직전에 일으킨 마지막 봉우리다. 이 산줄기는 양주군 광릉의 죽엽산(801m)에서 남하해 천보산, 수락산(水落山·637.7m), 불암산(佛岩山·507m)을 거쳐 그 주맥이 구릉산(검암산)에서 망우리고개를 넘어 망우산, 용마산(龍馬山·348m), 아차산에 이르며 아차산성이 있는 봉우리를 정점으로 한강으로 빠져든다.


▲ 눈이 채 녹지 않은 등산로로 일행이 불암산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아차산성은 문화재보호 및 산불예방으로 입산금지 푯말이 붙어 있고, 살벌한 철조망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뒤쪽으로 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이제 한북정맥 수락지맥의 끝지점에서 능선을 타고 간다. 한강이 바라보이는 동쪽은 남양주이고,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자욱하게 낀 서쪽이 서울이다. 이 수락지맥이 경기도와 자연적인 경계를 이룬다.


능선 위로 잘 조성된 등산로엔 평일인데도 등산객들로 북적거렸다.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를 가리키는 이정표는 180도 양방향으로 서 있다. 길을 따라 가면 된다.


아차산은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


아차산은 높지는 않지만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차산성과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사적 제455호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이나 흙 등으로 쌓은 축성물을 말한다.


▲ 서울시계종주팀이 안개가 자욱한 제명호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능선길의 전망은 동서남북이 확 트여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으로는 유려히 흐르는 한강, 북으로는 빌딩 숲속 뒤로 보이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전경이 펼쳐진다.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니 평일에도 등산객이 많이 붐비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차산 명품 소나무 제1호가 그 좋은 전망대 바로 옆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아차산의 바위틈에서 광진구와 한강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 광진구민과 함께한 소나무입니다’라고 이정표에 쓰여 있다. 10m도 못 가서 2호가 모진 세월을 견뎌낸 듯 함께 있다.


용마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인 헬기장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100여m 가면 용마산 정상이다. 그곳에 신라의 보루 흔적이 남아 있다. 용마산은 서울시 구역이고, 시경계는 망우산 방향이다. 그쪽으로 직진이다.


아차산 전역엔 150여 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확인된 파괴 고분만 해도 70여 기에 이른다. 이곳 용마산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항아리, 석제, 병 등으로 전형적인 신라 토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이다.


아차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망우산으로 연결된다. 자연히 망우산으로 넘어왔다. 망우산은 서울의 유일한 공동묘지다. 1933년 공동묘지로 지정된 이래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한용운 선생 등이 안장돼 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의 묘역도 있었으나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했다. 시경계길은 능선 위로 걷지만 공원묘지 순환길을 따라 가면 이들의 묘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망우묘지엔 한용운 선생 등 안장


망우리묘소 입구 주차장에는 13도참의군탑이 세워져 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조선군의 강제해산에 저항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했다. 그 해 11월엔 경기도 양주에 13도 의병이 모여 서울 진격작전을 벌였다. 비록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3년 건립한 것이다.


길이 이어지듯 시경계도 계속된다. 망우리 고개를 지나 망우산 밑으로 뚫린 중앙선 전철을 발아래 밟고 건넜다. 걷는 사람은 모르지만 지도엔 나타나 있다. 


갑자기 급경사가 나왔다. 위에서 보니 경사가 80도 이상은 족히 될 것 같다. 그 아래로 태릉-구리 간 고속화도로가 지나고 있다. 오금이 저려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겼다. 도로 관리하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듯한 거의 수직에 가까운 계단이 눈 아래 세워져 있다. 거기로 내려가야 한다. 양 팔을 뻗어 양쪽을 꽉 잡고 천천히 한 걸음씩 옮겼다. 백 수십 개 되는 계단을 내려오는 데 5분 이상은 걸린 것 같다. 초심자들은 이 길을 찾기 쉽지 않아 보였다. 이 길을 사람들이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내려서니 서울 신내동과 경기도 구리의 경계다. 해치상이 일행을 맞았다. 고속화도로를 건너기 위해 구리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서 횡단도로를 건넜다. 다시 서울 방향으로 내려와 오른쪽 이정표가 있는 망우산 극락사 방향으로 진입했다. 시경계가 계속되는 길이다.


▲ 망우산 공원묘지에서 종주팀이 유려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1구간 마지막 산인 구릉산으로 들어섰다. 조선시대 아홉 왕의 능이 동쪽에 있다 하여 동구릉이라 불렸다. 이곳은 원래 검암산이었으나 조선 왕실에서 이름에 ‘칼’을 연상케 하는 ‘검’자가 있어 역대 왕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에 불길하다 하여 이름을 못 쓰게 해서 구릉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구릉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왕릉터로 주목을 받은 곳이며, 가장 많은 왕이 안장돼 있다. 태조의 건원릉, 5대 문종과 왕비 현덕왕후의 헌릉, 14대 선조와 왕비 자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 등 조선 왕조의 17위가 모셔져 있어 사적 제199호로 지정돼 있다. 동구릉은 시경계에서 구리 쪽으로 조금 내려가야 한다. 잠시 들렀다 가려니 준족의 일행을 놓칠까 싶어 멀찌감치 쳐다만 보고 지나쳤다.


구릉을 내려서면서부터는 평지다. 47번 국도를 따라 계속 걷다가 갈매주유소에서 왼쪽으로 꺾어 육군사관학교를 구리 방향으로 우회해서 간다. 이어 경춘선 철로를 건너 삼육대 앞을 지나 태릉 담터사거리까지 가면 1구간 끝이다. 오전 10시5분에 출발해서 오후 4시40분쯤 도착했다.

 
 

      [2구간] 태릉 담터고개~삼육대 후문~제명호~불암산~수락산~망월정~진달래능선~근린공원(조성 중)~도봉산역 GPS 거리 15.6㎞


담터고개에서 다시 출발이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일기예보엔 오전에 잠시 비가 내리다 오후부터 갠다고 했으나 이날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일기예보가 맞는 날보다 안 맞는 날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것도 꼭 필요할 때는 항상 틀렸다. 틀렸던 기억만 뚜렷하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담터고개는 태릉과 남양주시 별내면과 경계다. 불암산 방향으로 가다가 한사랑한의원을 앞에 두고 논골편의점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동네길로 계속 간다. 삼육대 후문으로 들어가서 제명호수로 찾아가면 제대로 가는 것이다. 길은 아직 녹지 않은 상태라 미끄럽다. 제명호를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가면 불암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불암산중으로 접어들었다.


▲ 망우산 공원묘지 능선 위로 종주팀이 지나고 있다.

불암산은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마치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 불암산에 얽힌 전설도 재미있다.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었으나 조선왕조가 건국하면서 도읍을 정할 때 한양에 남산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가 한양의 남산이 되겠다고 내려왔으나 벌써 남산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선 채 그 자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암산은 서울을 등지고 있는 형세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세는 수락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서울의 북쪽 방어선을 이루며, 서울을 수호하는 기능을 했다. 정상 부분은 온통 바위산을 이루고 있으며, 작지만 웅장한 기품을 자랑한다.


불암·수락산은 6·25 서울 방어선


부슬부슬 내리는 비 사이로 불암산의 호젓한 등산로가 이어졌다. 밑에서 정상을 바라본 바위산의 모습과는 달리 걷는 길은 전형적인 육산이다. ‘맨발길’이란 이정표가 붙은 길도 있다. 그만큼 부드러웠다.


주능선을 따라 계속 앞으로 향했다. 샛길이 나올 땐 항상 이정표가 붙어 있어 길을 잃을 우려도 없다. 등산로 곳곳에 유명인사들의 시(詩)도 간간이 걸려 있다. 자욱한 안개는 노송 사이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듯하다. 나무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도시는 운무에 가려 전혀 보이질 않았다.


불암산 제2봉 정상 조금 못 미쳐 불암산성이 나왔다. ‘웬 산성이지’ 싶었다. 문화재 지정 예정이라는 이정표가 있다.‘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암산성은 규모는 작지만 삼국시대 석축 산성의 전형적인 축성기법을 보여주는 유적이며, 인근의 수락산보루·봉화산보루·아차산보루군 등과 함께 한강을 중심으로 삼국의 각축 양상과 고대 교통로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쓰여 있다. 일부에서는 산성의 규모가 협소해 산성이라기보다는 ‘보(堡)’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는 의견도 제기한다. 


▲ 수직에 가까운 계단을 종주팀이 내려오고 있다.

제2봉 정상엔 헬기장이 있다. 운동기구도 몇 가지 설치돼 있다. 비는 좀체 그칠 줄을 모르고, 운무는 서울 도심을 완전히 덮고 있다. 운무에 가려 빌딩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마치 바다에 잠긴 도시 같아 보였다. 그 운무의 바다 위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우뚝 솟아 있다. 우뚝 솟은 북한산과 도봉산은 하나의 섬이고, 빙산의 일각이었다. 구름 낀 날의 또 다른 멋진 풍광이다. 정말 진경산수화를 보는 느낌이다. 일행 모두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비와 추위는 잠시 잊은 듯했다. 이런 풍광이 있으리라고 전혀 기대를 못하고 “비가 와서 사진이 제대로 되겠나”라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출발했는데 전혀 의외였다. 그 멋진 풍광을 올라가는 전망대에서 감상하고 디카에 담을 수 있는 데까지 담았다.


‘밥시(밥 먹을 시간)’가 되어갔다. 정상 바로 밑 거북바위 옆에서 점심을 먹고 가자는 의견과 밥 먹으면 힘드니 넘어가서 먹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의견통일을 보고 같이 갈 줄 알았는데 먹을 사람 먹고, 갈 사람은 가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자율성의 존중인지, 중년의 고집인지.


시계(市界)는 불암산(509,7m) 정상 옆 쥐바위를 지나쳐 가지만 정상 조망에 혹시 뭔가가 있을지 몰라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기 직전 꼭 쥐같이 생긴 쥐바위가 등산객들을 반겼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확 트였다. 앞으로 나아갈 시계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락산과 불암산이 가르는 시계가 쭉 펼쳐졌다. 양쪽에 있는 서울과 남양주는 운무에 가렸고, 나아갈 능선만 우뚝하게 솟은 모습, 그 자체가 더없이 장관이었다.


이젠 불암산과 수락산의 경계를 이룬 덕릉고개 방향으로 하산이다. 산 밑으로는 불암산터널이 지나고 있다. 덕릉고개는 노원구의 북동쪽 시계에서 남양주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조선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묘소인 덕릉(德陵)이 고개 동쪽에 자리 잡은 데서 유래했다.


덕릉고개 위로 육교를 놓아 불암산과 수락산을 연결하고 있었다. 육교가 없던 시절엔 횡단보도를 건너는 등 한참을 돌아서 올라갔으나 지금은 편하게 지나쳤다. 불암산과 수락산의 시계종주 코스는 불수사도북(서울 5산) 종주하는 그 길이다. 


비 오는 날 운무로 서울 도심 잠겨 장관


이제 수락산이다. 수락산은 내원암 일대 계곡의 병풍 같은 바위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 사냥꾼 아버지가 호랑이가 물고 간 아들 ‘수락’이를 부르다 바위 아래 떨어져 죽은 뒤, 비 오는 날이면 “수락아, 수락아”하는 소리가 들려 수락산으로 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유적, 경승 못지않게 전해오는 일화도 특히 많은 산이다. 6·25 때는 육군 사관생도들까지 나서 불암산과 함께 서울 사수선으로 격전을 치렀던 산이기도 하다.


수락산 능선 조금 못 미쳐 얼마 전에 탄 듯한 산불의 흔적이 있었다. 다행히 조기진화에 성공한 것 같다. 산림이 심하게 소실되지는 않았다.


물이 많을 것 같은 이름과 달리 수락산은 올라갈수록 웅장한 바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치마바위 삼거리에 이르렀다. 눈이 녹지 않고 얼어 좁은 바위틈새와 바위 옆 등산로로 지나가기엔 위험했다. 날씨도 비가 내리고 추워 손까지 얼어붙었다. 등산로에 로프는 있지만 손을 제대로 펼 수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일행 전부 조심조심 올랐다. 준족의 아주머니들도 이런 길에서는 굉장히 조심스럽다. 엉덩이가 무거워 그런지 로프를 잡아도 오르기가 쉽지 않다.


▲ 수락산 거북바위를 오른쪽에 두고 일행이 올라가고 있다.

지나가는 길에는 바위들의 연속이다. 하강바위, 바로 그 옆에 남근 비슷하게 생긴 바위, 코끼리 바위, 종바위를 지나 마침내 정상 바로 옆 철모바위에 도착했다. 주말엔 막걸리 파는 비닐 천막집이 있는 곳이다. 잠시 안에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이정표는 ‘←4.7㎞ 수락산역(수락골), 수락산 정상 0.3㎞→, 수락산역(노원골) 5.2㎞↓’를 가리키고 있다. 정상까지는 불과 300m밖에 안 되지만 시경계가 아니고 의정부라 전부 수락골로 하산했다. 비가 내리니 가기도 그렇고, 또 갔다 하면 따라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정상에 들렀다 가는 걸 포기하고 곧장 뒤따랐다.

 

김시습 흔적 매월정 근처에 되살려


과거 기억에 쇠줄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하산한 적이 있었던 길이 이제는 나무계단으로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변신한 등산로로 전혀 힘들지 않게 내려왔다. 길 한쪽 옆으로 독수리바위가 비상할 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수락골에서 길이 이어진 깔딱고개 사거리에 도착했다. 일행은 매월정 방향으로 직진이다. 매월정에는 김시습의 흔적을 곳곳에 되살려 놓았다. 어린 시절 김시습이 살았던 자취를 좇아 그의 업적과 그가 지은 시를 보기 좋게 단장했다. 여유만 있으면 죽 둘러보고 가련만….


2구간 끝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운무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의정부로 가는 3번 국도로 쌩쌩 달리는 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진달래능선으로 한 걸음씩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고 보니 수락산에도 진달래능선이 있었다. 봄에 얼마나 아름다운 군락을 이룰지 궁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도가 나왔다. 제법 큰 길이다. 그런데 시계종주는 임도를 따라 계속 내려가면 낭패다. 왼쪽으로 빠지는 오솔길을 유심히 봐야 한다. 오솔길 들머리에 54트레킹동호회에서 제법 큰 리본을 달아놓았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서면 노원구에서 근린공원을 한창 조성 중이다. 2월 말 현재 거의 완성 단계다.


▲ 수락산 등산로는 반듯한 흙길에 의외로 호젓한 숲길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육교로 3번 국도를 건너 새로 지은 아파트를 지나 서울 창포원을 거쳐 도봉산역이 2구간 끝이다. 오전 10시20분에 출발해서 오후 5시20분에 도착했다. 1구간보다 거리는 짧았지만 시간은 조금 더 걸렸다.  


[서울시계종주 가이드] 지하철·버스로 접근할 수 있게 10개 구간으로 나눠


10개 구간으로 나눈 서울시계종주는 우선 편리하게 접근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간을 끊었다. 즉 지하철과 버스로 접근 가능하게 했다. 1구간은 지하철 2호선 강변역이나 5호선 광나루역에서 내려 워커힐로 올라가면 된다.


2구간 출발지점인 태릉 담터고개도 7호선 태릉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버스정류장이다. 거기서 7-3번, 1155번, 1156번 등 담터고개로 가는 버스는 많다. 3구간은 7호선 도봉산역이 바로 출발지점이다.


한 구간거리는 보통 15㎞ 정도 되기 때문에 간단한 도시락과 간식을 갖고 가는 편이 낫다. 등산과 마찬가지로 주로 산을 넘기 때문에 중간에 사 먹을 장소가 없다고 보면 된다.


서울의 경계를 걷기 때문에 둘러볼 구간에 대한 서울의 역사를 대강 훑어보고 가는 것도 지식을 넓히는 한 방법이다. 한국의 역사는 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은 무궁무진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시계종주를 계기로 역사와 산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기회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서울시계종주 동행팀] 거인산악회·54트레킹동호회


한결같은 준족들…이구씨가 총대장 맡아


▲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동호회가 연합한 서울시계종주팀을 이끌고 있는 이구 대장과 김옥희 총무, 유상헌 부대장(오른쪽부터).

54트레킹동호회는 1954년생들의 모임으로 간혹 남자들이 있긴 하지만 아주머니가 대부분이다. 남자들은 조용한 이들이라 별 농담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한다. 아주머니들도 백두대간을 두 번 종주한 사람들이라 종주 중에는 거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걷는 데 열중할 뿐이다. 간혹 휴식이나 식사 중에도 산과 관련된 얘기만 오갈 뿐 웃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거인산악회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더 많다. 한 번 종주에 나설 때마다 20명 내외씩 참가해 수적으로는 풍부했으나 분위기는 다소 무미건조했다.


거인산악회의 이구 대장은 이 두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1974년 거인산악회 창립 멤버로 본격적인 활동에 뛰어든 이구 대장은 1976년 창단한 회장의 갑작스런 이민으로 거인산악회 회장을 맡게 됐다. 얼떨결에 맡은 거인산악회 회장과 산행대장 자리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만 34년 장수 회장 겸 산행대장의 관록을 자랑하고 있다. 


거인산악회는 전국에 회원이 3000여 명 되지만 매달 한 번 이상 활동하는 회원은 300여 명 정도다. 운영진은 대장 5명, 부대장 10명 등 총 15명이다. 이들이 백두대간 2팀, 정맥 1팀, 명산 1팀, 해외트레킹 1팀 등 5개 팀을 대장 1명과 부대장 2명으로 각각 나눠 맡아 책임지고 있다.


54트레킹동호회는 2008년 순전히 트레킹 목적으로 창립한 모임다. 만든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단체가 백두대간 2회 종주, 백두산·키나발루·일본 아소산과 북알프스·중국 황산 등에 다녀왔다. 1년 내내 산만 다니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이 두 단체가 서울시계종주를 위해 모였다. 총대장은 이구씨, 총무는 김옥희씨, 부대장은 유상헌씨가 각각 맡았다. 54트레킹동호회의 김옥희씨는 ‘준족의 철녀’급에 속한다. 월 2회 산행에 답사·번개산행까지 책임지고 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사뿐사뿐 나는 것 같은 걸음으로 산을 탄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발걸음으로 항상 제일 앞장선다. 한참 가다가 한 번씩 물어본다. “내가 너무 빨리 가냐”고. 


같은 모임의 유상헌 부대장은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가 한국에 잠시 둘러보러 왔는데, 등산 다니느라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다. 지금 1년이 넘었다고 한다. 오로지 산만 다니고 있다. 이런 팀들과 서울시계종주를 하고 있다. 거의 가랑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월간산/ 글 박정원 차장  
         사진 이구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