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안교[萬安橋]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교.
경기유형문화재 제38호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79(260)
길이 약 30m, 폭 약 8m, 높이 약6m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능인
융릉(현륭원)을 참배하러 가기 위해 1795년(정조 19)에 축조한 홍예(虹霓) 양식의 석교이다.
당시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용산, 노량진, 동작, 과천을 통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으나 중간에 교량이 많고 남태령 고개 때문에 행차로를 닦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까지 왕이 행차하는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끝난 뒤 바로 철거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행차 때마다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평상시에도 백성들이 편히 다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정조의 명으로 영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
만안교(萬安橋)라는 명칭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7개의 홍예문(무지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예문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해 아치모양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板石)과 장대석으로 상판을 깔았다.
전체적으로 축조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
다리 남단에 건립 당시에 세운 ‘萬安橋(만안교)‘라고 새겨진 교비가 서 있는데
뒷면에는 이 다리의 축조가 경기도관찰사와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등의
유수(留守)까지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는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으나
국도 확장을 위해 1980년 8월 이곳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만안교 다리밟기’가 매년 이곳에서 행해진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만안교(萬安橋)의 안내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소재지 :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79
이다리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정조(正祖, 1776~1800제위)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陵)을 참배하러 갈 때 행렬의 편의를 위해 만들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揚州)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자주 참배하여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원래 수원으로 가는 길은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고 노량진과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다리가 많고 고갯길이 있어서 행차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과천에는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金尙魯)의 형 김약로(金若魯)의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시흥, 수원쪽으로 길을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지나게 되었다.
정조 19년(1795)에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왕명으로 3개월의 공사 끝에 이다리를 완성하였다.
만안교는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
원래는 남쪽으로 460m 떨어진 석수로의 교차지점에 있었는데 1980년 국도 확장 때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조윤형(曺允亨)이 쓴 만안교비(萬安橋碑)에 이 다리의 연혁이 나와 있다.
만안교[萬安橋]
조선 정조(正祖)의 현륭원(顯隆園) 참배 행차시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한 다리로 정조 19년(1795)에 건립하였다.
원래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한강을 건너고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에는 교량이 많고 남태령이라는 고갯길이 있어서 길을 닦고 행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며,
또한 영조(英祖)를 부추겨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김상노(金尙魯)와 관계되는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시흥길로 바꾸도록 하였다.
원래 왕의 행차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고 행차가 있을 때에 다시 가설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1794)으로 첫해에는
이처럼 임시로 나무다리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평상시 다리를 이용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으므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던 것이다.
다리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수문(虹蜺水門)이 5개라 하였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에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장대석을 깔아 노면을 형성했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
원래는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는데,
1980년에 국도 확장 때 이 곳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다리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만안교[萬安橋]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다리.
길이 31.2m, 너비 8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1795년(정조 19)에 조성되었다.
현재 아랫부분은 모래 속에 묻혀서 확실한 상태를 알 수 없고,
7개의 수문은 매끄럽게 다듬은 장대석을 총총하게 잇대어 아치(arch)를 형성하였는데,
아치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은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7개의 아치 사이에는 크고 작은 선단석(扇單石)·장군형[缶形]
또는 잠자리형[蜻蜒形]으로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을 차곡차곡 쌓아 메꾸었다.
아치 상단의 이맛돌은 중앙부를 둥글게 다듬은 장군형 무사석으로 연결하고,
그 윗면에 장대석을 쌓아 길바닥을 형성하였다.
지금은 그 위에 아스팔트를 포장하고 또 콘크리트 난간도 덧붙여놓아서 원형이 많이 손상되어 있다.
원래는 경부국도(京釜國道) 위에 있었으나 하천의 흐름을 변경하였기 때문에 물이 흐르지 않는 폐천에 걸려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할 때
건너기 편리하게 하고자 가설한 다리로 그 옆에는 만안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에 의하면 이 다리의 가설은 당시 경기도관찰사를 위시하여
병마수군절도사와 수원·개성·강화 등의 유수(留守)까지 동원된 큰 공사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우리고장의 문화재총람(文化財總覽)』 -지정문화재편(指定文化財篇)-(경기도, 1978)
만안교비명(萬安橋碑銘)
만안교의 축조를 칭송함, 머리글을 겸함
남충현(南充縣 과천현) 관아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바로 화성으로 가는 행차길이다.
우리 성상(聖上, 조선22대 정조대왕)께서
해마다 원침(園寢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을 성묘할 때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 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이 내를 건넘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대체로 행차길에는 하천과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였다가 왕의 행차 후 바로 철거하였다.
따라서 얼음이 풀릴 때와 장마가 질 때에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이에 전직 경기관찰사가 돌다리를 바꾸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미천한 신(현직 경기관찰사)이 명을 받고 가을 음력 7월에 일을 착공하여 3개월만에 준공하였다.
교량은 길이 15장(丈, 1장은 10자)에 폭은 4장이며, 높이는 3장이고
수문(비문에는 5개이나 실제로는 7개)은 5개이다.
임금께서는 감독하는 사람과 장인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고 특별히 만안교란 이름을 내리셨다.
생각컨대 왕자가 다리로 편안히 건너게 된 것은
한(중국의 한나라)의 장안교(長安橋)에서 비롯하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또한 도보로 건너는 작은 다리와 수레로 건너는 큰 다리가
성주(成周, 중국의 주나라) 때에 만들어졌으나 돌로 쌓아 만년을 전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 다리는 다행이도 화성의 행차길에 있어 왕의 수레는 1년에 한 번,
어머니의 가마는 10년에 한 번씩 육룡(六龍, 왕의 수레, 여섯 마리의 말을 비유함)에 멍에를 메이고
8개의 방울을 울리며 편안히 지나갔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만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다.
그리고 편리함은 만백성에 미쳐 멀고 가까운 짐 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를 건넘으로
이제는 옷을 걷어 올리거나 험한 길을 돌아가는 걱정이 없어졌다.
이로써 만만년토록 임금의 큰 은혜를 입고 자애로운 덕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공사를 처음 시작할 때 돌을 채취하였는데 하천가에 돌이 나와 경비를 반감할 수 있으니
마치 하늘이 도운 것 같아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신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머리를 숙여 그 일을 기록하며 기리어 말한다.
왕께서 해마다 한 번씩 성묘를 행차하시니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복(福)이 함께 이르게 되었으니 아래에는 하천이 있습니다.
때때로 어머니의 가마를 모시고 만년토록 편안하소서.
은혜가 만백성에 미치니 마음 놓고 건넘에 환성을 올리도다.
천년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도다.
정현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 병무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
광주부유수 도순찰사 규장각검교직제학 신(臣) 서유방 삼가 지음
가선대부 호조참관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 조윤형 삼가 쓰고
학신(學臣) 유한지 전면(前面) 삼가 쓰다.
감동(監童, 감독관) 첨사(僉使, 절도사 아래의 첨절제사) 김천보
오위장(五衛將, 중앙 군사조직인 오위의 장수) 장 전, 김대연, 김원섭
영비(營裨, 감사나 유수를 따라 일을 돕던 무관직 비장) 가선(嘉善) 서협수
영교(營校, 군영의 장교) 가선(嘉善) 서의린, 영리(營吏,관아의 아전) 이효석
각수변수(刻手邊首, 조각장의 책임자) 이삼홍
석수변수(石手邊首, 석공자의 책임자) 박복돌
홍예변수(虹霓邊首, 무지개 돌을 쌓은 책임자) 최홍서
야장변수(冶匠邊首, 대장장의 책임자) 정일성
상지(上之) 19년 9월(1795년 음력 9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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