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의 - '북한산 7대사찰(진관사ㆍ승가사ㆍ문수사ㆍ중흥사ㆍ노적사ㆍ국녕사ㆍ백화사) 탐방산행' 코스
구파발역→이말산(진관근린공원)→진관사 입구→진관사 일주문→진관사 탐방→진관사계곡→비봉→승가사 갈림길→승가사 일주문
→승가사 탐방→승가사계곡→구기삼거리→구기계곡→문수사 탐방→대남문→대성암계곡?→대성암→행궁지→산영루→북한산성계곡
→중흥사 탐방→노적사 탐방→노적교→중성문→시구문→국녕사 탐방→가사당암문→백화사계곡→백화사 탐방→백화사 정류장→구파발역
오늘은 '북한산 7대사찰(진관사ㆍ승가사ㆍ문수사ㆍ중흥사ㆍ노적사ㆍ국녕사ㆍ백화사) 탐방산행'을 위해 길을 나선다.
2주 전에 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을 하면서...
오르내리다가 만난 사찰들 중 번성하는 사찰과 폐사된 사찰에 대해 잠시 생각을 나누다가...
'정답은 물(水)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물론 다른 연유가 있겠지만 오래 전 사찰은 물이 나는 곳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고...
물이 없다면 죽음이니까...
해서 번성하는 사찰은 좋은 물이 나오고, 그것도 충분히...
한여름 사찰을 찾아 산행을 하면 물공급에 지장이 없으리라는 기특한 생각을 해보았다.
오늘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예상된다는 예보가 있다.
계곡을 끼고 산행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계획했던 사찰탐방산행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길을 나서는데,
여정을 다소 짧게 잡은 것은 내일 또다른 산행을 해야 하기에 무리하지 않기 위함이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10여 개 사찰을 탐방하는 코스로 다녀올까 한다.
구파발역을 나서자 새벽까지 비가 왔는지 땅을 젖어있고, 습도는 높아서 이말산 들머리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땀이 솟는다.
이말산을 지나 진관사계곡을 오르면서 상당히 높은 습도에 몸이 지친다.
북한산 7대사찰 탐방이라는 테마를 갖고 시작한 산행인지라 머리로 몸을 달래며 무사히 마쳤다.
구파발역에서 이말산 들머리를 07시 30분에 들어서서 북한산 7대 사찰탐방을 마치고
백화사입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시각이 16시 02분이다.
약 8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사찰탐방산행 중 두 번의 알탕과 한 번의 탁족, 그리고 마른 휴식 두 번을 했다.
▼ 07시 30분 - 구파발역
▼ 07시 30분 -
▼ 07시 31분 -
▼ 07시 39분 -
▼ 07시 42분 -
▼ 07시 43분 -
▼ 07시 45분 -
▼ 07시 53분 -
▼ 07시 57분 -
▼ 07시 59분 - 진관사 삼거리에 도착...
▼ 08시 06분 -
▼ 08시 08분 -
진관사津寬寺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에 있는 절.
시대 고대/삼국
건립시기 신라 진덕왕 연간
성격 절, 사찰
유형 유적
소재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분야 종교·철학/불교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하여 진관사를 창건하였다.
고려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그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왕욱(王郁: 安宗)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랑원군(大良院君)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신혈사는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사실을 눈치 챈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열두 살인 대랑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년 뒤 목종이 죽자 대랑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현종이 되었고,
1011년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1090년(선종 7)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9년(숙종 4)과 1110년(예종 5)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조선에서는 1397년(태조 6) 태조는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육지와 수중의 고혼과 아귀를 위하여 법식(法食)을 공양하는 수륙재를 지냈다.
이를 본받아 척불왕이던 태종도 1413년(태종 13) 이 절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이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를 열었다.
그 뒤 1463년(세조 9)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 1)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1
854년(철종 5)과 1858년에 중수하였다.
1879년(고종 16)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고, 1
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나한전·독성전(獨聖殿)·칠성각·홍제루(弘濟樓)·종각(鐘閣)·일주문·선원(禪院)·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대웅전에 봉안된 본존불은 고려 현종을 구해준 불상이라 전하며,
홍제루의 고색이 깃든 초석이나 축대, 대웅전 후면의 축대나 석불 등은 이 절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법당 앞에는 석탑 대신 석등 2기가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08시 12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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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시 0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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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시 2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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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시 52분 -
▼ 09시 54분 -
▼ 09시 56분 -
▼ 10시 01분 -
▼ 10시 02분 -
▼ 10시 03분 -
▼ 10시 04분 - 승가사 일주문
승가사僧伽寺
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에 있는 절.
시대 고대/삼국
건립시기 756년(경덕왕 연간)
성격 절, 사찰
유형 유적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 1
분야 종교·철학/불교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하여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지칭되었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
그 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하였고,
1090년(선종 7)에는 구산사(龜山寺)의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중수하였으며,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불당을 중수하였다.
1422년(세종 4)에 왕이 7종을 통합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할 때는 선종에 속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를 얻어 일신, 중건하였다.
1941년에 도공(道空)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비구니 도명(道明)이 중창하여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약사전(藥師殿)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그 뒤를 이어 비구니 상륜(相侖)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현재는 산신각(山神閣)·향로각(香爐閣)·동정각(動靜閣)·범종각(梵鐘閣)·대방(大房)·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좁고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알맞게 배열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창건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
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가 수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성월(城月)이 이절에서 배출되어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의 직책을 맡아
쇠잔하던 불교를 크게 진작하는 등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찰이다.
또한 예로부터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유물로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상이 있으며,
서북방 100m 지점에는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부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과 약사전에 모신 약사여래의 영험, 그리고 약수의 효험 등은 이 절을 기도처로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절의 뒤편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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