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世說新語] [586] 요요적적 (寥寥寂寂)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손 가는 대로 뽑아 든 책이 이태준의 '무서록'이다.
펼치던 손길이 '고독'에 가서 멎는다.
늦은 밤 곁에서 곤히 자는 아내와 아기를 바라보다가 그는 문득 외로웠던가 보다.
이렇게 썼다.
"인생의 외로움은 아내가 없는 데, 아기가 없는 데 그치는 것일까.
아내와 아기가 옆에 있되 멀리 친구를 생각하는 것도 인생의 외로움이요,
오래 그리던 친구를 만났으되 그 친구가 도리어 귀찮음도 인생의 외로움일 것이다."
그러고는
"산집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았노니,
쓸쓸하고 고요하여 자연과 하나 되다
(山堂靜夜坐無言, 寥寥寂寂本自然)"란 한시를 인용하고
"얼마나 쓸쓸한가! 무섭긴들 한가!
무섭더라도 우리는 결국 이 요요적적에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라며 글을 맺었다.
찾아보니
'선시의경(禪詩意境)'에 실린 송나라 때 선사 야보도천(冶父道川)의 시다.
채워서 다시 읽어본다.
"산집의 고요한 밤 앉은 채 말 없으니,
적막하고 쓸쓸함이 본래의 자연일세.
무슨 일로 갈바람은 숲과 들판 흔들고,
한 소리 찬 기러기 긴 하늘에 우짖는고
(山堂靜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
何故西風動林野, 一聲寒雁唳長天)."
원시는 '요요적적'이 아니라 '적적요요'다.
밤은 고요하고 나는 말이 없다.
이 적적하고 고요한 상태가 기쁘다.
그런데 가을바람이 온 숲을 흔들며 지나간다.
이에 질세라 기러기도 긴 하늘 위에 끼룩끼룩 소리를 얹어 이 적막을 깨뜨린다.
같은 책에 실린 송나라 승려 백운수단(白雲守端·1025~1072)의 시는 이렇다.
"산마루 위 흰 구름 풀렸다 되말리고,
하늘가 흰 달은 갔다간 다시 오네.
고개 숙여 띠집 처마 아래로 들어와선,
나도 몰래 깔깔깔 몇 번을 웃었던고
(嶺上白雲舒複卷, 天邊皓月去還來.
低頭卻入茅簷下, 不覺呵呵笑幾回)."
구름은 혼자 말렸다 폈다 하고,
흰 달은 하늘 위로 제멋대로 다닌다.
몸 하나 뉠 옹색한 움막에 들어와서도,
그 구름과 저 달의 대자유가 내 것인 듯하여 자꾸 혼자 웃는다.
고독한 적막을 바람 소리 기러기 울음이 가른다.
흰 구름과 밝은 달은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독을 꿈꾸면서 또 번잡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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