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걷기길] 치악산둘레길 르포
11코스 명품 잣나무숲길 인기 최고…관음사 108대염주 ‘입이 쩍’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잣나무 숲이 절경인 치악산 둘레길 11코스.
산꾼에게 원주는 ‘치악산雉岳山의 고장’으로 기억된다. 치악산은 1984년 우리나라에서 16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수많은 등산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치악산은 기골이 장대한 대표적인 골산骨山으로 정상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다. 때문에 비로봉(1,288m)은 ‘누구나 갈 수 있지만 누구나 오를 수 없는 정상’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이제 남녀노소 누구나 치악산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수평의 길’이 열렸다. 지난 5월 완전 개통된 ‘치악산둘레길’이다.
치악산둘레길은 땀을 뻘뻘 흘리지 않고도 치악산을 마주할 수 있다.
“치악산 둘레를 11개 코스, 139.2km에 걸쳐 한 바퀴 도는 길입니다. 원주시와 치악산국립공원, 이웃 횡성군과 영월군이 합작해 만든 멋진 길이지요.”
(사)한국걷기협회 김인호 회장이 둘레길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한국걷기협회는 치악산둘레길을 조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고, 현재 관리와 걷기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주체다.
“원창묵 원주시장님이 걷기 길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원주굽이길을 비롯해 혁신도시·기업도시 둘레길, 봉화산과 종합운동장 둘레길 등 시내 곳곳에 걷기 길을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치악산둘레길을 완공함으로써 명실상부 ‘걷기길의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11코스의 잣나무숲길은 푹신한 흙을 밟으며 유유자적 걷는 재미가 있다.
국립공원을 통과하는 최초의 둘레길
치악산둘레길은 코스마다 풍경과 볼거리가 제 각각이라 어느 코스를 걸어야 할지 고민이 될 지경이다. 김 회장은 11코스와 1코스의 일부를 엮은 ‘하이라이트 코스’를 추천해 주었다.
“도심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숲이 좋아 가장 인기 있는 구간입니다. 맛 뵈기로 이 정도만 걸어도 충분할 겁니다.”
취재를 위해 김인호 회장을 비롯해 전덕수 사무총장, 김남석 기획이사, 구형숙 지도강사, 홍수연 홍보이사가 동참했다. 막 개장한 길인만큼 홍보에도 열심인 모습이다.
걷기 들머리는 11코스 막바지 지점인 한가터 삼거리다.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넓은 주차장을 만들었고, 최신형 이동식 화장실도 들여놓았다. 이렇게 한갓진 곳에 시설을 투자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닌데 원주시의 결단이 새삼 놀랍다.
나무에 손을 대고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 것도 둘레길에서 꼭 해볼 일이다.
주차장 뒤편으로 잣나무 숲길 진입로가 있다. 초입엔 해충기피제를 뿌릴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놓아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해두었다. 이런 작은 배려가 더욱 큰 기대를 만든다.
약간의 오르막이 시작되고 이내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잣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는 숲이 시작된다. 뜨거운 햇볕이 걱정되는 날이었지만 숲에 들어서니 온통 그늘이다. 나무 사이로 속도를 높이며 부는 바람은 선풍기가 따로 없다. 평일 오전인데도 숲길을 걷는 사람이 꽤 있다. 대부분은 배낭을 메지 않고 물 한 병만 손에 들고 산책삼아 나온 시민들이다.
“치악산은 수직 오르막길만 있는 줄 아셨죠? 둘레길은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지그재그 수평으로 걷는 재미가 있답니다. 얼마나 여유로워요.”
전덕수 사무총장의 말처럼 길은 산허리를 휘감으며 물 흐르듯 올라선다. 인공적으로 낸 길이라 자연미가 떨어질 거란 생각은 괜한 것이었다. 잣나무 사이로 난 길은 숲 속에 잘 녹아들어 억지스럽지 않았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숲에 들 수 있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지만 아주 가끔은 마스크를 벗고 숲의 공기를 마음껏 들여 마셔보자.
이야기가 있는 길로 만들 것
한동안 숲의 풍광에 취해 걷다 보니 안오릿골 정상에 도착했다. 과거 이곳엔 마을이 있었는데 주변에 오리나무가 무성해 밖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전쟁통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정표 한 번 보세요. 저희가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치악산둘레길의 길잡이띠.
파란색은 치악산의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상징하고, 분홍색은 진달래와 복사꽃을 표현했다.
새로 만든 이정표에는 으레 그렇듯 구간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화살표를 둘러싼 원의 색깔이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혹시 이거?
“맞습니다. 정방향, 역방향 표시입니다. 파란색이 정방향, 분홍색이 역방향입니다. 그리고 여기 밑에 QR코드를 찍어 보세요.”
김 회장의 말을 듣고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었더니 곧바로 ‘치악산둘레길’ 홈페이지로 연결되었다. 각 코스별 안내와 지도, 고도표가 잘 나와 있고, 구간 별 거리도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심지어 교통편과 완주 후 원점으로 돌아가는 교통편까지 안내해 두었다. 이 정도면 사람 가이드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다.
“누구나 언제든 와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길’을 만들어야죠. 뚝딱 길만 만들어 놓고 사람이 걷지 않으면 그건 ‘죽은 길’이에요. 이런 사소한 배려가 사람을 모이게 하고, 생명이 넘치는 길로 만드는 방법이지요.”
길게 이어진 나무데크 계단을 내려오니 작은 계곡에 피서객이 가득이다. 그런데 그 흔한 평상 하나 없다. 오로지 피서객이 각자 가지고 온 깔개와 텐트가 전부다. 어릴 적 계곡에서 피서를 즐기던 그때 그 모습이다.
“아는 사람만 온다는 계곡입니다. 큰 계곡은 아니지만 돈 받는 사람도 없고 닭백숙을 먹어야 자리를 내주는 그런 장사치도 없어요. 서울 사람들은 이런 풍경 참 오랜 만에 볼 거예요.”
치악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이 어찌나 차고 깨끗한지 손을 담그는 순간 ‘앗, 차가워!’ 소리가 절로 난다. 이 길, 발길을 잡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계곡 위 주차장으로 올라서면 11코스가 끝난다. 치악산둘레길의 종점이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서 완주의 기쁨을 누리겠지만 오늘은 중간 지점일 뿐이다. 주차장을 지나 1코스 입구에서 다시 길을 잇는다. 둘레길 종합안내도 옆으로 스탬프 찍는 함과 둘레길 코스 안내지도 보관함이 있다.
여권에 전체 22개의 스탬프를 각 코스마다 2개의 스템프를 찍을 수 있다.
“둘레길 여권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걷기길 완주를 목표로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이 여권에 각 코스마다 2개씩, 총 22개의 스탬프를 찍으면 완보인증서와 배지, 기념품을 증정합니다. 벌써 완주하신 분이 꽤 되세요.”
협회에서는 앞으로 각 코스마다 전설과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해 한 편의 스토리텔링북으로 엮을 계획도 있다.
“무작정 걷기만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금은 게임하듯 100대 명산 완등 배지를 모으고, 소설을 읽듯 스토리가 있는 장소를 찾아갑니다. 치악산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찾아내 엮는다면 걷기가 곧 소설이 되고 영화가 될 겁니다.”
김 회장은 “과거 지자체마다 유행처럼 우후죽순 만들었던 걷기길 대부분은 사라져 버렸다”며 “아무런 인문학적 토대 없이 길만 이으면 된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길 위에 인생이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1코스 관음사에 봉안된 108대염주. 북한에 갈 것까지 총 두 벌의 염주가 모셔져 있다.
평화통일 기원하는 거대한 108대염주
1코스 시작점인 국형사에는 ‘솔바람 숲길’이라는 또다른 길이 있다. 이곳에선 소나무 숲을 따라 맨발로 걸을 수 있다. 발을 씻을 수 있는 족욕장도 마련해 두었다. 갈 길이 멀어 한 바퀴 다 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왕 지나가는 김에 양말을 벗고 맨발로 흙길을 잠시 걸어본다. 특별히 울퉁불퉁한 돌도 없는데 디딜 때마다 발이 아프다. 이건 땅을 욕할 게 아니다. 그저 만신창이인 나의 몸을 원망해야 할 뿐.
국형사에서 관음사로 가는 길은 잣나무 대신 소나무와 낙엽송이 지키고 있어 그 짧은 시간에 치악산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왼쪽으로는 나무 사이로 원주혁신신도시의 풍경이 지나간다. 치열함 속에 돌아가는 도심이지만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저 한가로운 일상으로 보인다.
현대적 분위기의 성문사를 지나 다시 숲길로 들어서면 길은 조금 더 거칠어진다.
“도심과 가까운 11~1코스는 비교적 길이 좋지만 나머지 구간은 치악산의 야성미를 느낄 수 있는 길이 많습니다. 강변도 지나고 마을도 지납니다. 넓은 임도도 있지요. 산림이 잘 가꾸어진 치악산이라 나무 수종도 다양해요. 계절마다 가장 걷기 좋은 길이 있어요. 가령 가을에는 3코스 수레너미길의 오색단풍이 예술이고, 겨울에는 9코스 자작나무길이 그림 같습니다.”
두런두런 둘레길 안내를 듣다 보니 어느 새 이번 취재의 종점인 관음사에 도착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찰이지만 이 안에는 꼭 구경해야 할 명물이 있다.
“불가에서 쓰는 염주가 있는데, 그 크기가 엄청납니다.”
대웅전 왼편에 자리한 건물 문을 여니 둥근 염주 108개가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염주 한 알의 크기가 농구공보다 훨씬 크다. 가장 큰 모주母珠의 지름은 74cm, 무게는 240kg에 달한다. 나머지 107개의 염주도 각각 지름 45cm에 무게 45kg이다. 이 모두의 무게를 더하면 7.4톤에 이른다.
“재일교포 3세 임종구씨가 2000년에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아프리카에서 자생하는 수령 2,000년짜리 ‘부빙가’ 원목을 구입해 1년 동안 깎아 만든 것이라고 해요. 이런 염주가 모두 3벌 있어요. 한 벌은 일본 화기산 통국사에 있고, 한 벌은 여기 관음사에, 나머지 한 벌은 북한 묘향산 보현사에 봉안할 예정이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당분간 관음사에 함께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고 있는 염주는 총 2벌이죠.”
이 염주는 방문객이 직접 만질 수 있다. 티베트 불교의 마니차摩尼車처럼 108개의 염주를 모두 어루만지면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다고 한다.
치악산은 조선시대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이다. 국형사 근처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지어진 동악단이 있다.
수평의 치악산은 평화로움
관음사에서 오늘 취재를 마친다. 걸은 거리는 6.1km, 사다리병창 코스로 치악산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온 거리와 엇비슷하다. 비록 이 길의 끝이 비로봉은 아니었으나 훨씬 더 많은 치악산의 모습을 보았고, 그 아름다운 모습 하나하나 마음속에 저장했다. 수직의 치악산은 수려한 명산名山이지만, 수평의 치악산은 평화로운 명상瞑想이었다.
치악산둘레길 코스 가이드
1코스 꽃밭머리길 국형사~상초구주차장 (제일참숯) 11.2km, 약 3~4시간 소요
볼거리 국형사, 관음사 108대염주, 보문사, 연암사.
2코스 구룡길 상초구주차장 (제일참숯)~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7km, 약 3시간 소요
볼거리 치악산 자락의 아기자기한 계곡과 숲, 새재 옛길.
3코스 수레너미길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태종대 14.9.km 약 5시간 소요
볼거리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느티나무 가로수길, 수레너미재.
4코스 노구소길 태종대~초치(임도 코스 26.5km, 마을길 코스 12.9km)
볼거리 노구소, 두산임도와 계곡.
5코스 서마니강변길 초치~황둔하나로마트 10.4km, 약 4시간 소요
볼거리 자작나무& 소나무& 낙엽송 등이 어우러진 숲길, 서마니강변 데크길, 신림 황둔 찐빵마을.
6코스 매봉산자락길 황둔하나로마트~석기동 14.3km, 약 4시간 소요
볼거리 해발 700~750m 높이에 조성된 황둔 임도, 매봉산 맞은 편 감악산의 산 능선.
7코스 싸리치길 석기동~용소막성당 9.8km, 약 3시간 소요
볼거리 과거 소금과 생선, 생필품의 통로로 서울과 영월을 잇던 싸리치옛길의 풍경.
8코스 거북바우길 용소막성당~석동종점 11.4km, 약 4시간 소요
볼거리 구학산 7부능선에 조성된 명품 숲길, 거북바위.
9코스 자작나무길 석동종점~금대삼거리 15.0km, 약 4시간 소요
볼거리 신림면 구학리(석동마을)에서 판부면 금대리까지 이어지는 자작나무길.
10코스 아흔아홉골길 금대삼거리~ 당둔지주차장 9.3km, 약 3시간 소요
볼거리 골이 아흔아홉 개나 될 만큼 깊다 하여 지어진 아흔아홉골과 낙엽송 군락지.
11코스 한가터길 당둔지주차장~국형사(미개통 정식코스 9.4km, 임시코스 7.6km)
볼거리 지그재그 편안한 잣나무 숲길, 국형사와 계곡.
※1코스 꽃밭머리길과 11코스 한가터길 사이 17.8km 구간에는 공영버스가 왕복한다. 주말과 공휴일 하루 5회 운행.
운행 노선은 당둔지 승강장〜 한국관광공사(반곡역)〜혁신체육공원(한가터 주차장)〜국형사〜덕현길 입구(행구수변공원)〜 석경사 입구(원주 얼 광장)〜황골 삼거리〜 하초구 승강장이다. 버스 시간표와 치악산둘레길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홈페이지www.chiaktrail.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 033-762-2080.
글 손수원 기자 사진 김종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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