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대나무 도시락 들고 ‘인왕제색도 마을’로 쏙! MZ세대 아지트가 되다
오래된 풍경이 저격한 ‘갬성’
건축가 조병수와 서촌을 걷다
10년간 서촌에 ‘온그라운드 갤러리’를 비영리로 운영해온 건축가 조병수는 지난봄 건축 전시 공간 통의동 ‘막집’을 개관했다. 100년 된 한옥과 1960년대 지어진 양옥은 ‘재생’에 무게를 두고 크게 손대지 않았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요즘 2030 MZ세대들에게 서울에서 가장 ‘힙’한 동네를 묻는다면, 단연 경복궁 서측 동네 ‘서촌’을 꼽는다. MZ세대 ‘등린이(등산과 어린이를 합친 말로 등산 초보를 일컬음)’에게 등산 성지가 됐고, 3개월 만에 15만 명 이상이 관람한 ‘핫’한 전시를 여는 전시장도 있다. 때마침 경복궁을 중심으로 ‘궁중문화축전’(~31일)도 열린다. 이 동네에서 작업실과 갤러리를 운영하다가 최근 전문 전시 공간 ‘막집’을 연 유명 건축가 조병수와 어느 가을 낮, 서촌을 걸었다.
◇강남 건축가가 서촌에 반한 이유
10년째다. 서울 서초동에 사무실을 둔 건축가 조병수(63·조병수건축연구소 대표)가 주 1~2회 서촌살이를 시작한 게. 조병수는 파주 헤이리 ‘카메라타’, 강원도 화천 ‘이외수 문학관’, 남해 ‘사우스케이프’, 강남 신사동 ‘퀸마마 마켓’, 부산 ‘f1963′ ‘임랑 문화공원(박태준 기념관·12월 개관 예정)’ 등을 설계한 유명 건축가. 그를 강한 자성으로 끌어당긴 서촌의 마력은 단순했다. 편안함 그리고 만만함. “새롭고 큰 건물보다 낡았지만 소박미 넘치는 고만고만한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동네를 걸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것 같았어요.”
경복궁 서쪽 ‘자하문로10길’에 있는 ‘온그라운드 갤러리&카페’. 조병수 작품을 비롯해 신진 건축가, 디자이너들의 전시가 이어진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매 주말 서촌으로 향하던 그는 10년 전 경복궁 서측 창성동에 건축 전문 갤러리 ‘온그라운드(지상소)’를 열었다. ‘딱 3년만 해보자’ 생각했던 갤러리는 어느덧 이 구역 터줏대감 소리를 듣게 됐다. 건축 전문가·동호인들과 건축학도를 위해 그간 사비를 들여 비영리로 운영해오다 작년 5월 카페 공간을 추가하며 온그라운드 갤러리&카페로 바꿨다. 대대적인 인테리어를 하진 않았지만, 벽에 생긴 비정형의 프레임 사이로 공기와 소리가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마감재 속에 혈관처럼 엉켜 있다 부서진 벽 틈 사이로 튀어나온 전선도 그대로 뒀다. 무심한 듯 세련된 감수성으로 재해석한 이 적산가옥은 반듯하고 깔끔한 ‘정형’과 ‘직선’에 익숙한 ‘아파트 세대’들에게도 통했다. MZ세대는 ‘벽 프레임’을 사이에 두고 각 공간을 넘나들며 인증샷 한 번씩은 꼭 남기고 간단다.
그라운드시소 서촌이 있는 복합 문화 공간 ‘브릭웰’은 서촌의 촘촘한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브릭웰 중정에서 위를 바라 본 모습.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몬태나 주립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건축학과 도시설계학을 공부한 그가 최근 천착하는 것은 ‘막’이다. “쉽게 말해 막김치나 막사발처럼 대충 만든 것 같은 허술함, 겉멋 부리지 않은 솔직함을 통해 느껴지는 편안함이 ‘막의 미학’”이란다. “막김치도 레시피대로 만들면 맛이 안 나고 감으로 만들어야 제맛이 나는 것처럼 건축도 공식이나 정석을 따르기보다는 약간 비틀고, 어긋나게 해 얻은 우연의 결과물이 더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온그라운드 갤러리&카페 맞은편에 지난 4월 개관한 ‘막집’은 조병수의 ‘막’의 미학을 넌지시 엿볼 수 있는 곳. 100년 된 낡은 한옥과 1960년대 지어진 2층 양옥집을 되살려 만든 문화 공간이다. 각각 한의원과 한의사 사택이었다가 식당을 거쳐 한동안 방치돼 있던 공간의 낡은 벽지와 빛 바랜 페인트 등 ‘때’만 벗겨 내고 시간의 흔적을 남기는 데 집중했다. 기와, 기둥, 돌 틈 사이 야생초가 제 집인 양 자리 잡은 마당은 관람객들에게 작은 숨구멍이 되어준다. 23일부터는 조병수 개인전 ‘땅의 소리’전(~연말)을 연다. ‘임랑 문화공원’ ‘지평집’ ‘이외수 문학관’ ‘사우스 케이프’ 등 건축가의 대표 건축물 이야기를 보여주고, 여행 중 스케치할 도구가 없어 호텔에 비치된 초콜릿으로 그렸다는 스케치 작품 등도 나온다.
인기 전시인 ‘요시고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그라운드시소 서촌. 2030세대에겐 '서촌 MZ 코스' 중 하나로 꼽힌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전지적 골목 시점
조병수의 막집은 통의동 ‘자하문로10길’의 왕복 2차선 도로를 두고 온그라운드 갤러리&카페와 마주 보고 있다. 경복궁 영추문 담벼락을 등지고 서쪽으로 보도블록을 따라 걸으면 식물이 있는 ‘라 카페 갤러리’, 역사 전문 독립서점 ‘역사책방’, 예술가의 아지트인 갤러리 ‘팩토리2′ 등과 만난다. 조병수는 작은 문화 벨트를 이루는 이 길에 애정이 많다고 했다. 상업 공간들이 모여 있는 골목은 볼거리가 많지만, 주거지가 밀집된 골목이 정겹고 재미있단다.
‘조병수 코스’를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골목대장처럼 앞장서 좁다란 골목 길로 안내했다. 온그라운드 갤러리&카페 뒤편 골목 초입은 아담한 대나무 화단이 펼쳐졌다. 도로에서 조금 떨어졌을 뿐인데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골목 숲’에 들어선 듯했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은 지름길이 되기도 하고, 돌아가는 길이 되기도 하고, 걷다 보면 다시 원점일 때도 있다. 조병수 자신도 골목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고. 맛있는 냄새가 나면 코를 킁킁거리며 어느 집에서 나는 냄새인지 상상해보기도 하고, 집 밖으로 고개 내민 나무를 구경하기도 한다. 애용하는 코스는 막집에서 시작해 스위스 가정식 식당 ‘라 스위스’ 뒷길을 거쳐 아트사이드 갤러리로 나오는 길이다. 일대에 MZ세대들이 즐겨 찾는 코스가 몰려 있다. 막집에서 2~3분 거리 골목 안쪽에 있는 복합 문화 공간 그라운드시소 서촌도 그중 하나다. 주최측에 따르면 그라운드시소 서촌의 ‘요시고 사진전: 따뜻한 휴일의 기록’ 전시는 지난 6월 시작해 3개월 만에 관람객 15만 명이 다녀갔다. 인기를 반영하듯 평일에도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비가 갠 후 너럭바위에 앉아 인왕산을 보며 물소리를 감상하고 있는 동네 주민. 인왕산 자락에 사는 서촌 사람들에게 인왕산은 그 자체로 힐링과 위로의 공간이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조병수는 여유가 있을 땐 대로를 건너 통인 시장을 통해 수성동 계곡까지 간다. 수성동 계곡으로 가는 코스 역시 그때그때 다르다. 헌책방으로 시작해 복합 문화 공간이 된 대오서점과 목원의 서촌가락, 50여 년 전통의 중국집 영화루가 이어지는 사선형 골목은 오래된 것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좋다. 느릿하게 걸어 한 바퀴 돌아 사무실로 돌아오면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2011년 문 닫았다가 서촌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2015년 되살려낸 서촌의 마지막 오락실 옥인오락실(구 용오락실)을 거쳐 남도분식, 박노수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연두색 09번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이라 다소 번잡하지만 볼거리가 많다.
도시락을 싸주는 ‘헤이델리’. 도시락통을 반납해야 하는 약간의 불편함마저 ‘서촌’이기에 괜찮다. / 박근희 기자
“서촌은 그간 고도 제한, 문화재보호구역 지정, 한옥 보존 지역 지정 등 법적 장치가 꾸준히 이어져 비교적 옛 서울의 풍경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에요. 합필 규제(필지 두 개를 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로 큰 건물을 짓기 어렵기 때문에 서울 가로수길이나 삼청동처럼 대형 건물들이 들어설 수 없어요. 좁은 공간을 최대한 연구해 써야 하니까 실험적인 건물이나 개성 있는 상점이 많아요. 그런 집과 상점이 서촌의 표정을 만들어요.”
‘무목적’ 건물에 있는 ‘인왕산 대충유원지’ 야외석 앞으로 인왕산이 펼쳐진다. 여러 건축 규제들이 있는 동네에서도 무목적 건물은 2019년 서울시 건축상을 받았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도시락 들고 자락길··· 인왕산 즐기는 새로운 방법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에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공개된 이후 인왕산도 새롭게 보인다. 조병수도 인왕산을 늘 볼 수 있어 서촌 사무실을 좋아한다고. 서촌의 묵직함이 인왕산 때문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듯싶다. ‘인왕제색도’는 음력 5월 25일(양력 7월 하순쯤) 비구름이 걷히며 절경을 드러낸 인왕산을 그렸지만, 가을 풍경도 놓칠 수 없다. 그래도 이왕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려면 비 온 다음이 제격이다. 계곡길을 따라 올라가면 간단한 도시락이나 간식을 싸들고 와 너럭바위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이들을 목격할 수 있다. 박노수 미술관 부근, 8월에 문 연 헤이델리는 ‘대나무 2단 도시락’으로 조금씩 소문나는 중. 수~토요일에 한해 친환경 도시락을 판매한다(예약 우선). 도시락을 먹고 도시락통을 반납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인왕산 소풍 길에 이만큼 소박함이 넘치는 도시락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하게 나온다.
건축가 이충기·김진숙이 설계해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을 받은 ‘인왕산 초소책방’의 야경. / 박근희 기자
수성동 계곡을 따라 오르면 자락길과 만난다.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20분 정도 오르면 인왕산 더 숲 초소책방이 나온다. 청와대 방호를 위해 경찰 초소와 기지로 쓰던 ‘인왕CP’를 시민 휴식 공간으로 고쳐 개방한 곳. 애초 경계와 감시가 목적이었던 위치인 만큼 루프 톱 좌석에 앉으면 일대는 물론 남산까지 보여 인왕산 전망대로 통한다. 건축가 이충기·김진숙이 설계한 이 건물은 지난 8월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을 받으며 찾는 이들이 더 늘었다.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낮도 좋지만 해 질 녘부터 밤까지 야경도 아름답다. 가을 밤의 운치를 만끽하기에는 인왕산 암벽에 조명이 들어오는 1층 야외석도 괜찮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담벼락을 따라 걷는 것도 운치 있다. 이달 31일까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궁과 동묘 일대에선 '궁중문화죽전'이 열린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진경산수화길’ 코스에 있는 ‘청운 문학 도서관’. 한옥 공공도서관으로 조경이 잘돼 있어 쉼표를 찍기 좋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필운대로변 누하동 ‘무목적’ 건물의 3층에 있는 카페 인왕산 대충유원지는 인왕산의 또 다른 전망대다. 카페 야외 ‘베란다’에 앉으면 인왕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유지로 2019년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설계자 홍영애)을 받은 건물에는 카페를 비롯해 갤러리, 공예전문점 등이 들어서 있다. 보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한층 가깝게 다가가고 싶다면 진경산수화길을 걸어볼 것.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렸던 현장과 ‘장동팔경첩’ 그림 속 장소를 상상하며 찾아가는 ‘테마 길’이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시작해 청운문학도서관, 겸재 정선 집터, 수성동 계곡 등을 거치는 3km 코스 중 윤동주 문학관 시인의 언덕부터 한양도성길을 따라 청운문학도서관까지 내려오는 짧은 구간만 걸어도 충분히 가슴 벅찬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배낭 여행지 가서 맛본 라따뚜이, 유학 시절 먹던 뢰스티··· 서촌에 다 있네! ]
골목마다 이국 가정식 맛집
아담한 공간이 오밀조밀하게 모인 서촌은 소박한 가정식을 내세운 식당이 많다. '라 스위스'는 스위스 베른 농가 가정식을 선보이는 오래된 맛집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촌은 요즘 이국 가정식을 파는 식당마다 만석이다. 여행지를 추억하며, 유학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현지 맛을 재현한 가정식을 찾아다닌다. 안 그래도 오밀조밀한 공간에 몇 개 없는 좌석은 예약 없이 가면 낭패를 보기 쉽다.
누하동 골목 안쪽에 있는 누하의 숲과 ‘토속촌’ 골목 위쪽에 있는 체부동 이마리는 일본 가정식이 유명하다. 그중 이마리는 낮에만 가정식을 판매하고 저녁에는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로 운영한다. 점심 메뉴로는 밥과 국, 구이, 튀김이 곁들여지는 이마리 정식(1만원)과 여기에 연어가 곁들여지는 연어 사시미(1만2000원), 덮밥류 등이 있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가까운 서촌의 한옥촌과 멀리 북악산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정면 창가 자리는 예약 없이는 앉을 수가 없다.
누하동 필운대로에 있는 푼크툼은 프랑스에서 살다 온 주인 홍영미 셰프가 프랑스 거주 당시 집에서 해먹던 맛 그대로 라따뚜이(1만4000원)를 만들어낸다. 커리 등도 ‘집밥’처럼 건강하게 요리해 동네 단골이 많은 곳이다. 통인동 퀴진 라 끌레는 미국·캐나다·프랑스 현지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오너 셰프 배진성씨가 ‘퀘벡식 프랑스 가정식’을 내놓는다. 낮에는 수제 버거 위주, 밤에 식사 메뉴를 판매한다. 식사 메뉴 중 쇠꼬리를 활용한 ‘보양식 라구파스타’(점심·2만6000원)를 부담 없이 찾는다. 퀘벡 메뉴가 다양한 것보단 프랑스 요리를 퀘벡식으로 해석해 푸짐하게 내는 쪽에 가깝다.
스위스 가정식 맛집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가스트로 통은 문 연 지 10년 된 곳이지만, 3년 전 확장하면서 젊은 층 사이에선 라 스위스로 더 알려지고 있다. 현재 가스트로 통에선 와인을 곁들인 코스 요리를, 라 스위스에선 스위스 국민 음식인 감자 뢰스티, 치즈 퐁듀, 라클렛 등 베른 농가 가정식을 단품 메뉴로 보다 편하게 맛볼 수 있다.
박근희 기자
Copyright 조선일보
'▣산행·도보여행정보☞ > ♡ 산행·여행 지도 &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튼, 주말] 선암사엔 무지개 닮은 다리, 송광사엔 ‘얼짱 사천왕상’이··· 만추에 그들은 山寺로 갔다 (0) | 2021.11.06 |
---|---|
서울시, 깊어가는 가을 정취 느낄 수 있는 산책길‘서울 단풍길 96선’선정 (0) | 2021.10.28 |
[전라도의 산-신안 증도 상정봉 124m] 느릿느릿 산과 해변 걸으며 증도의 보물을 찾아라 (0) | 2021.10.21 |
[영남알프스 환종주] 하늘억새길 가장 유명, ‘영알 9봉’ 완등 銀貨 인기 (0) | 2021.10.16 |
[아무튼, 주말] 이천으로 떠난 가을 소풍 - ‘달항아리 멍’ 때리고, ‘에덴 낙원’ 거닐며 위로를 받았다 (0) | 2021.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