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길 따라 걷기가 여행의 한 테마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이 그중 대표적이지요.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추세에 맞춰 지난 9월 인천 강화 나들길 등 7곳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선정했습니다.
내 나라 안 아름다운 길이 여기뿐이겠습니까만 우리 길들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첫 시도라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문화생태탐방로 중 한 곳인 경기 여주 여강길을 다녀왔습니다.
다른 길들을 제쳐두고 여강길을 서둘러 찾은 까닭은 영속성이 위협받고 있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인은 4대강 사업에 따른 여강 일대 강천보 조성공사였습니다.
보를 세우면 사실상 여강길의 훼손이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고 현지 지역 주민들이나 환경단체 등은 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문화와 생태가 ‘있는’ 길이 아닌 ‘있었던’ 길이 되고 말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여강길 운영 단체인 ‘강길’의 박희진 사무국장이 서둘러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찾길 바란다는 뜻을 밝힌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여강길에 서니 차가운 강바람이 두 볼과 머릿결을 스칩니다.
굽돌아 가는 강물을 따라 물억새도 춤을 춥니다.
겨울 여강길은 이렇듯 넉넉하면서도 역동적인 자태로 여행자를 맞고 있었습니다.
여주 사람들은 여주를 휘돌아가는 남한강을 여강이라 부릅니다.
검은 말(驪)을 닮은 강(江)이란 뜻이지요.
예로부터 남한강은 세곡을 실어 나르고 한양 가는 길손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어서 여주에만 12개의 나루터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여강길은 이처럼 선인들이 걷던 남한강 주변의 여러 길들을 하나로 모아 탐방코스로 만든 것입니다.
전체 길이는 55㎞쯤 됩니다.
하루에 다 볼 수는 없어 ‘강길’에서는 여주읍내로 돌아오는 대중교통 유·무에 따라 3개 코스로 나눴습니다.
▲ 한 여행자가 ‘바위늪구비길’을 걷고 있다. 물억새와 큰고니 등 ‘스스럼없이 찾아온 자연’이 동행하는 여강길 최고의 코스 중 하나다. |
▶1코스 - 우만리, 흔암리… 나루터 흔적 따라 15.4㎞
1코스는 특성상 ‘나루터길’이라 불린다.
부라우와 우만리, 흔암리 등 이름만큼 아름다운 나루터의 흔적들을 좇는 길이다.
달을 맞는 누각 영월루에서 출발해 고운 모래가 특히 아름다운 금모래은모래 유원지, 아홉사리과거길 등을 거쳐 도리마을에서 끝난다.
거리는 15.4㎞. 5~6시간 소요된다.
▲ 부라우나루터의 철새 군무. |
▲ 개치나루터 풍경. |
▶2코스 - 경기·강원·충청 3도 3색 문화의 향기 솔솔
2코스는 ‘세물머리길’이다.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 등 삼도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따라 각 지역 문화를 엿보며 걸을 수 있다.
모래톱이 예쁜 청미천과 합수머리에 버티고 선 붉은 절벽 자산, 1970년대 풍경으로 착색된 듯한 부론마을 등을 거친다.
다만 차도를 따라 걷는 구간이 많은 것이 흠.
17.4㎞에 6~7시간가량 걸린다.
▶3코스 - 바위늪구비길 원시강 생태와 만나 보세요
3코스는 ‘바위늪구비길’. 원시강의 생태와 만날 수 있다.
골재채취장이 습지로 변한 바위늪구비 일대가 하이라이트다.
물억새의 흔들림도 좋고, 단양쑥부쟁이(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2급) 등 희귀 동식물과 만나는 것도 뜻밖의 즐거움을 안겨 준다. 모랫길에선 신발을 벗고 걸어도 좋겠다.
22.2㎞. 7~8시간 소요된다.
‘강길’은 1코스와 3코스의 핵심 지역들을 엮은 ‘추천 코스’를 내놨다.
바쁘고 성격 급한 도시인들의 성화가 빗발쳤기 때문.
1코스 우만리 나루터에서 옛 남한강대교를 타고 여강을 뛰어넘은 뒤 3코스 바위늪구비가 있는 강천마을에서 끝난다.
5~6시간가량 걸린다.
낙엽 쌓인 흙길과 모랫길, 자갈길 등이 번갈아 나오는 여강길은 아름다웠다. 물억새도 지천이다.
물살이 잔잔해지는 곳에선 조약돌 던져 물수제비 한번 떠 보시라.
예전 과거 보러 한양 가던 선비들도 오랜 여정에서 오는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비슷한 놀이를 즐기지 않았을까.
여강길은 철 따라 다른 자태를 선보인다.
박희진 사무국장은 “봄에는 강물의 색깔이 돌아오는 느낌이 좋아요.
여름엔 강수욕도 즐기고 달빛 쏟아지는 강길을 걸을 수도 있지요.
가을엔 끝 간 데 없이 핀 물억새가 지평선을 만들어요.”라고 설명했다.
눈 내리는 강변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철새들의 자태는 겨울철 여강길의 백미.
호사비오리(천연기념물 제448호)와 백조로 불리는 큰고니(천연기념물 201호) 등이 한가롭게 여강 위를 유영하고, 청둥오리 등은 무시로 군무를 펼친다.
말똥가리 등 맹금류와도 어렵지 않게 조우할 수 있다.
곳곳에 옛이야기 숨겨둔 유적들도 많다.
부라우나루터의 부라우는 ‘붉은 바위’란 뜻.
여강을 향해 불쑥 솟은 암반에는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의 정자터가 남아 있다.
민진원의 호 또한 붉은 바위를 뜻하는 단암(丹巖).
바위 앞쪽에 또렷이 음각(陰刻)돼 그 시대를 웅변하고 있다.
우만리 나루터는 조선시대 우만이라는 이름의 장수가 난 곳이다.
도리마을과 흔암리 마을을 잇는 아홉사리 산길은 충주 사람들이 과거 보러 가던 길. 9월9일 이곳에 피는 구절초를 캐내 달여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박 사무국장에 따르면 그 전설을 믿고 미리 구절초를 심어 놓는 사람들도 있단다.
하류의 삼합마을은 남한강과 섬강, 청미천 등 강줄기 세 개가 합쳐지는 마을이다.
원주와 여주, 충주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3도 사람들이 아직도 일년에 한 차례 체육대회를 연다.
삼합을 바라보고 있는 흥원창터는 고려시대 세곡을 모아둔 조창.
굽이쳐 흐르는 세 강줄기를 여유있게 내려다보고 있는 자산의 풍채도 일품이다.
●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강길’(blog.daum.net/rivertrail)은 매달 2·4주 여강길 정기 답사를 진행한다.
식대 5000원. 물과 음료수, 모자, 선블록 등을 가져가면 좋다.
단체는 예약을 하면 요일에 관계없이 안내자와 함께 답사할 수 있다.
코스는 수시로 변경된다.
5일에는 특별히 ‘여강 5일 장터길’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여주 5일장에 들러 잔막걸리 마셔가며 옛 정취를 만끽할 예정이다.
강길 031-885-9089, 박희진 사무국장 010-2744-3930.
→가는길: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을 나와 37번도로를 타고 여주 버스터미널 방향으로 가다보면 은모래금모래 유원지가 나온다.
가족·연인 등 개별적으로 탐방을 할 경우 이정표와 ‘강길’ 측에서 나무 등에 매 놓은 파란색 리본을 따라 가면 된다.
→맛집:(구)보배네 만두(031-884-4243)가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집.
배춧속을 넣은 시골만두를 푸짐하게 내준다. 여주읍 오금리에 있다.
보리밥(5000원), 만두(5000원), 두부(4000원).
글ㆍ사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서울신문 2009-12-0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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