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위례길 中 위례둘레길(금암산-이성산성-객산-남한산성) & 위례역사길(이성산성-광주향교-선법사) 이어걷기' 코스
마천역→만남의광장→식당가→호국사입구 들머리→성불사갈림길→금암산갈림길→원적사갈림길→골프장갈림길→소나무숲→연리목
→널문이고개→참샘골갈림길→6번송전탑→철탑쉼터→흔들바위→금암산 정상→어미새와 아기새 바위→범바위→덜미재→큰얼굴바위
→금암산 고분→광암정수장갈림길→향교고개/향여고개→동사지갈림길→남문지갈림길→이성산 정상→건물지→제1저수지→제2저수지
→카페 수막새→이성산성입구교차로→춘궁동주민센터→광주향교→교산교→선법사입구→선법사→병풍바위→선법사갈림길→객산갈림길
→객산 정상→사미고개→막은데미고개→하사창동갈림길→새바위→갈라진이빨바위→상사창동갈림길→제1토루갈림길→전망바위갈림길
→바람재→법화골갈림길→가지울갈림길→남한산성 제13암문(벌봉암문)→한봉갈림길→봉암성암문→남한산성 제3암문(동장대암문)
→옥정사터/옥정사멧돌→제1군포터→북문(전승문)→서문(우익문)→서문 전망대→산성암→산할아버지흉상→호국사→식당가→마천역
하남 위례길[河南 慰禮길]
경기도 하남시에 조성된 걷기 코스.
위례사랑길·위례강변길·위례역사길·위례둘레길의 4코스가 있으며, 총길이는 64㎞이다.
백제의 초기 도읍인 위례성(慰禮城)이 있던 경기도 하남시에서 시민들이 걷고 싶은 길을 만들어 건강을 증진하고,
관광명소로 육성하여 지역경제를 살리는 한편 시를 대외적으로 더욱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2010년 7월 조성에 착수하여 총공사비 11억 원을 투입하였고, 2011년 7월에 완공하여 개방하였다.
한강을 따라 펼쳐지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남한산성과 위례성 등의 유적을 통해
역사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4개의 코스를 조성하였으며, 총길이는 64㎞에 이른다.
(1코스) 위례사랑길:산곡천(山谷川)에서 닭바위~연리목~도미나루~두껍바위를 거쳐 팔당댐에 이르는 5㎞의 구간이다.
도미나루는 도미설화(都彌說話), 곧 백제 때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왕권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도미 부부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사랑길이라는 명칭은 도미 부부의 사랑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뿌리가 다른 두 소나무의 줄기가 합쳐진 연리목(連理木)이 사랑길의 의미를 더하며, 닭의 벼슬과 부리를 닮은 닭바위, 큰고니 도래지 등이 있다.
(2코스) 위례강변길:산곡천에서 위례사랑길과 반대 방향으로
덕풍천~미사리경정공원~나무고아원~선동축구장을 거쳐 서울 접경까지 이어지는 13.5㎞의 구간이다.
하남시 외곽을 감싸 안고 흐르는 한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하며 걷는 코스이다.
강가 습지에서는 4~5월에 잉어떼들이 산란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한강 둔치에서는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나무고아원은 각종 공사장에서 뽑혀 버려진 나무들, 갈 곳 없는 나무 등을 옮겨 심고 가꾸어 상처를 치유한 뒤 재활용하는 곳이다.
(3코스) 위례역사길:광주향교에서 이동산성~동사지~선법사에 이르는 5.8㎞의 구간이다.
하남시의 대표적 역사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이성산성(사적 422호)과
조선시대 광주(廣州)의 문화·교육 중심지 역할을 하던 광주향교(경기도문화재자료 13호)를 비롯하여
춘궁동 동사지(사적 352호),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12호),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보물 13호),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981호), 백제 온조왕이 마셨다는 온조왕 어용샘 등이 있다.
(4코스) 위례둘레길:하남시청에서 샘재~남한산성(벌봉)~금암산~이성산성을 거쳐 덕풍골에 이르는 39.7㎞의 구간이다.
하남 위례성의 궁 안 지역을 둘러싼 산을 걸으며 하남시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코스인데,
남한산성 성곽과 벌봉, 객산, 금암산, 이성산 등을 지나면서 하남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해발 512m의 벌봉은 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병자호란 때 수많은 벌이 날아와 청나라 군사를 쏘아 조선군의 승리를 도왔다는 전설이 있다.
금암산은 바위가 많을 뿐 아니라 바위 색깔이 비단색을 띤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출처 : 두산백과]
위례둘레길과 위례역사길 이어걷기는 교통편을 고려해서 시작점과 마침점을 마천역으로 한다.
그리고 중식을 매식하기 위해 적당한 시각을 맞추고자 들머리를 호국사로 하고,
산불감시탑 전에 있는 금암산 갈림길에서 금암산-이성산성을 거쳐 춘궁저수지 부근 먹거리촌으로 내려선다.
점심식사 후 광주향교를 거쳐 선법사에서 객산을 올라서고, 이후 벌봉을 거쳐 봉암성, 남한산성의 북문에서 서문까지,
그리고 서문전망대에서 데크계단과 산할아버지흉상을 거쳐 들머리였던 호국사 앞을 지나 마천역에서 여정을 마친다.
▼ 12시 21분 - 이성산 정상에서...
▼ 12시 24분 - 이성산성 건물지...9년 만에 다시 온 이성산성은...
하남 이성산성 河南二聖山城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있는 신라시대 산성.
시대 : 고대/삼국/신라
문화재 지정 : 사적 제422호
건립시기 : 신라시대
성격 : 산성
유형 : 유적
면적 : 128,891㎡
대표자 : 국유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초일동·광암동 일대
역사적 변천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신라가 6세기 중반경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된 합(盒)과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 등은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우 비슷하다.
황룡사는 553년부터 조성되었는데, 이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주의 치소는 광주 일대로 추정되는데, 그 치소성이 이성산성 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성벽과 저수지, 건물터 등에 축조 시기의 차이가 확연히 나타나고,
출토 유물도 시기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고려 초기의 청자 조각이 약간 보일 뿐이어서, 고려 초기 이전에 산성의 기능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산성은 해발 209.8m의 이성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북쪽으로는 한강 유역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1986년~2010년에 진행된 12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두 차례에 걸쳐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처음에 쌓은 성벽은 일정 기간이 지나서 붕괴되었는데,
그 뒤 처음 쌓은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4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다시 성벽을 쌓았다.
처음 쌓은 성벽은 생토면을 ‘ㄴ’자 형태로 깎아낸 다음 너비 7∼8m 정도로 내외협축(夾築)하여 축조하였다.
성돌은 화강편마암을 사용하였는데, 너비는 40∼50㎝이고, 두께는 15∼24㎝ 정도이며,
두께와 너비의 비율은 대략 1:2.2∼1:3 정도로 너비가 긴 네모난 모양이다.
뒷채움돌은 마름모꼴로 뾰족하게 만들어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 맞물리게 쌓았다.
생토면과 뒷채움돌 사이에는 물이 스며들지 않게 점토를 다져 넣었다.
뒤에 다시 쌓은 성벽은 점토와 잡돌을 놓아 바닥을 다진 다음 1m 정도 크기의 받침돌을 놓고서 성돌을 쌓은 모습이다.
성돌은 처음 쌓은 성벽의 성돌과 달리 질 좋은 화강암을 뿌리가 긴 4각뿔 모양으로 다듬었는데,
크기는 너비 30㎝, 두께 20㎝ 안팎이다.
성벽은 윗단을 아랫단 보다 10㎝ 정도 들여 쌓아 처음 쌓은 성벽보다 경사도가 완만한 편으로,
처음 쌓은 성벽보다 견고하고 아름다우면서 고운 편이다.
성벽에는 여러 곳의 문터가 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된 남문터와 동문터는 모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구조로 바닥에는 배수 시설이 남아 있다.
동문터는 한 차례 고쳐 다시 만들었는데, 너비 6.2m의 크기를 3.56m로 축소하였다.
동문터 북쪽에는 치(雉)가 남아 있는데,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되었다.
처음 쌓은 성벽의 치는 너비 13.2m, 길이 2.1m이고 다시 고쳐 쌓은 성벽의 치는 너비 24.5m, 길이 5.1m이다.
성벽 안쪽에서는 너비 2∼3m의 회곽도(廻郭道)도 확인되었다.
산성 안에서는 다수의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발굴된 것만 11기이지만, 주춧돌이 노출되는 등 건물터가 확실한 것을 포함하면
최소 20기 이상의 대형 건물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건물은행정·의례의 기능에 맞추어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된 저수지 3곳도 확인되었다.
1차 저수지는 처음에 성벽을 쌓았을 때 타원형으로 만들었지만,
2차 저수지는 1차 저수지 안을 파낸 다음 네모나게 쌓아 만들었고
석축 바깥에는 2m 두께로 점토를 다져 물이 새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3곳의 저장 구덩이와 4곳의 의례 유구도 확인되었다.
의례 유구는 건물의 주춧돌이나 주춧돌 주변에 큰 돌을 놓고서 주변을 잔돌로 쌓은 구조로,
그 가운데 1기에서는 17마리에 해당하는 토제마(土製馬)와 철제마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특징
산성 안의 건물은 각각 영조척(營造尺)을 달리하였다.
곧 네모난 건물터는 고구려척을 사용하였고, 다각형 건물터는 당척을 이용하였다.
이로써 보아 건물을 세울 당시에는 고구려척에서 당척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C지구 저수지에서는 길이 29.8㎝인 나무로 만든 당척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한편 문살무늬[格子文], 선조무늬[線條文], 민무늬[無文], 생선뼈무늬[魚骨文] 암키와와 수키와가 출토되어,
산성 안에는 위상이 높은 대형 건물이 많이 자리하였음을 알려 준다.
한편 흙으로 만든 벼루 40여 점,
‘무진년(戊辰年)’, ‘남한성(南漢城)’, ‘수성(須城)’, ‘도사(道使)’, ‘촌주(村主)’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목간이 다수 출토되었다.
목간은 이성산성의 이름이 남한성이었을 가능성과 함께 축성 시기, 신라의 지방지배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
화살촉과 투부(鬪斧) 등의 철제 무기류와 쇠스랑, 삽, 주조(鑄造) 괭이, 자귀, 낫 등의 농·공구류도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중반 이후로 편년되는 신라 계통의 무기와 농공구들이다.
또한 대형 시루, 동이류, 자배기류, 대형 항아리나 옹·단지류 합(盒)과 뚜껑, 사발, 굽
다리접시, 나무빗, 동물뼈 빗치개, 나무 얼레빗, 요고(腰鼓), 나무팽이, 박바가지, 나무 이남박,
칠기, 나무 인형, 나무망치, 짚신, 버들고리, 천 조각 등 다양한 토기들과 나무 제품들도 출토되었다.
이것 역시 6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 유물로, 당시의 생활과 예술, 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의의와 평가
이성산성은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한 뒤에 설치한 신주의 치소성이었으며,
이후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성으로 활용되면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지방지배 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성벽과 저수지, 건물터 등에 여러 차례 고쳐 쌓은 흔적이 뚜렷하여 성곽 축성 방법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출토 유물에도 제작 시기의 차이가 드러나 있어 당시의 생활과 예술, 의례, 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산성[河南 二聖山城]
이성산성은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초일리·광암리(현재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초일동·광암동) 등 3개리에 걸쳐 있는
표고 209.8m인 이성산의 주봉을 에워싸고 동남쪽으로 전개되는 산능선상에 축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의 지형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으며, 성벽이 통과하는 선상의 고저차이는 75m이다.
이 산성의 평면형태는 부정형을 나타내고 있는데, 총 둘레는 1,925m이며, 산성 내부의 면적은 약 155,025㎡로 47,200평이 된다.
성벽의 축조방법은 주로 내탁법을 사용하였으며 남쪽의 계곡을 가로지르는 부분과 서쪽의 일부는 내외협축을 하였다.
북벽은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무너져서 30°의 경사각을 유지하고 있다.
성벽이 무너지기 이전에는 성벽의 높이는 4~5m, 경사각은 70~75°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석은 판암계 계통으로 0.2~0.6m 크기이다. 성벽의 안쪽에는 4줄의 석열을 배치하여 위로부터 토사의 압력을 줄이고 있다.
남벽은 50×40×50㎝ 크기의 성석을 사용하여 내외협축 하였는데 현재 높이는 3m 정도로 계측된다.
성벽은 매 단마다 10㎝씩 들여쌓기를 하여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으며 경사각은 75˚이다.
남문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성산성의 초축벽(初築壁)이 확인되었다.
이 초축벽은 이미 확인된 외벽보다 1.3m 안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장방형의 석재를 거의 90˚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현재 4~5단 정도 노출되었다.
남벽에서는 배수구가 확인되었는데,
양 측벽은 3~4단을 약간 기울여 쌓았으며 바닥은 치석(治石)한 판석을 계단식으로 쌓고 판석으로 덮었다.
성벽에는 4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서남·동·남쪽에 문지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중에 남문이 정문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개구부의 너비는 5m이다.
남문지의 서쪽 측벽은 10단 이상의 석축이 남아 있으나, 동쪽 측벽은 거의 붕괴된 상태이다.
치(雉)는 10개소 정도가 시설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각 치에는 각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장(女牆)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북벽에서 회곽(廻廓)도로보다 1m 정도 높게 1.5m 두께로 석축이 잔존하고 있었다.
성내의 도로망은 성벽과 성문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성벽의 안쪽에 2~3m 폭으로 성벽을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회곽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이 회곽도를 통해 병력의 신속한 이동과 배치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성산성에서는 1·2차의 발굴을 통해 모두 6개의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장방형 건물이 3개로 각각 8·9·12각 건물이다.
성내에는 발굴된 건물지 이외에도 여러 개의 건물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지구 건물지는 E지구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건물의 전체 규모는 도리간이 15간, 양간(측면문)이 4간이다.
초석의 수는 모두 80개인데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54개이다.
초석은 변성암 계통의 편마암으로 크기는 70×90×30㎝ 정도이다.
각 면을 다듬지는 않고 기둥이 놓이는 윗면만 약간 다듬어 투박한 자연석 그대로의 모습이다.
초석은 생토층을 1~1.3m 크기로 파고 20~30㎝ 크기의 적심석을 쌓고 그 안에 점토를 다져 넣은 후에 올려놓았다.
바닥이 암반층인 경우는 암반을 평평하게 다듬고 그 위에 바로 초석을 놓고 있다.
건물의 평면 크기는 긴 쪽이 32.02m, 짧은 쪽이 7.88m이다.
이것을 고려척으로 환산하면 90×22척이 되고, 당척으로 환산하면 105×26척이 된다.
건물의 내부면적은 76.5평이다.
이 건물의 구조상의 특이한 점은 가장 남쪽 열의 초석이 하나도 없고 적심석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모두 파괴되었다기 보다는 다른 초석들 보다 힘을 덜 받는 구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처마 끝에 덧대어서 비나 볕을 피하도록 만들도록 만든 차양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건물은 특별히 기단부를 높이거나 하지 않고 산의 완만한 경사면을 다듬어서 만들었으며
개축되었거나 다른 문화층이 있었던 흔적이 전혀 없다.
건물지 내에서 온돌이나 난방에 관계된 유구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상생활용의 건물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초석과 초석사이의 거리가 정면칸이 2.13m, 측면칸이 1.97m로 매우 촘촘하다.
여기에 기둥을 세울 경우 남아 있는 공간이 너무 조밀하여 공간 이용에 문제가 있다.
또한 벽을 올렸을 경우 남아 있을 벽의 기초부분도 전혀 없다.
따라서 이 건물은 누각형의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 건물의 기능을 말해주는 유물은 전혀 없지만 창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건물의 붕괴는 화재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연붕괴라고 생각된다.
C지구 1호 건물지는 이성산성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산의 경사면을 깎아 평탄하게 만들고 축조하였는데, 발굴 전에는 퇴적토가 많이 쌓여 있었다.
건물지의 구조는 도리간이 17간, 양문이 4간으로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건물지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초석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가운데 부분은 민묘로 파괴되었다.
건물의 정면은 남동향이다.
특이한 것은 건물의 가운데 부분에 1m 높이의 큰 돌이 놓여 있다.
윗부분은 직경 30㎝ 정도로 판판하며 아래로 내려 갈수록 굵어져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초석이 놓일 위치에 놓여 있어 건물의 구조와 관계된 것으로 생각된다.
초석이 놓이는 방법과 초석간의 거리 등은 E지구 장방형 건물지와 차이가 없다.
C지구 2호 건물지는 1호 건물지와 축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행하게 놓여 있다.
축대는 현재 높이 1.2m 정도이고 길이는 0.33m이다. 강돌과 한쪽면만 치석이 된 20~50㎝ 크기의 돌로 축조하였는데
하단부에는 큰 돌을 놓고 윗부분에는 큰 돌과 작은 돌을 섞어서 85˚의 경사를 유지하며 쌓았으나 계단은 발견되지 않았다.
건물지는 파괴가 심한 상태이며, 전체구조는 도리간이 16간, 양간이 4간으로 34×7.9m 정도이다.
있어야 할 초석은 모두 85개이지만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26개에 불과하다.
건물방향은 1호 건물지와 평행하고 있다.
이 건물지에서 유일하게 연화문와당(蓮花文瓦當) 1점이 출토되었다.
8각 건물지는 D지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중심부에 하나의 초석이 있고 이 중심초석에서 1m 거리에
4개의 초석이 각각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하게 놓여 있다.
이 4개의 초석 사이사이마다 직경 30㎝에 높이 50㎝의 돌이 세워져 있다.
다시 중심초석에서 2.7m 거리에 8개의 초석이 놓여 있고, 이 초석에서 1.7m 거리에 다시 8개의 초석이 있다.
초석들은 화강편마암으로 다른 건물지의 것과 차이가 없다.
초석과 초석 사이에는 20~40㎝ 크기의 할석으로 2단 또는 3단을 쌓아 연결시켰는데
이것은 벽을 쌓아 올리기 위한 기단부라고 생각된다.
구조상 특이한 점은 초석과 초석 사이에 세워져 있는 0.5m 높이의 돌이다.
계란 모양의 이 돌들은 땅위에 그대로 세워져 있어 쉽게 넘어지기 때문에 초석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건물의 구조와는 관계가 없는 의례적인 목적의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지의 내부 면적은 16.18평으로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작은 규모이다.
9각 건물지는 E지구의 장방형 건물지의 북동쪽 4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지의 구조는 중심부에 120×50×30㎝ 정도의 초석 4개가 놓여 있고,
중심부에서 2.7m 거리에 9개의 초석이 1.9m 간격으로 놓여 있다.
여기서 다시 2.5m 바깥쪽에 9개의 초석이 놓여 있다.
따라서 가운데 있는 4개의 초석 둘레로 2열의 초석이 9각으로 놓여 있는 상태이다.
기단 퇴적상태를 보면 지표 아래 1.1m 지점에서 생토층이 노출되었는데,
층위는 구별이 되지 않으며 점토와 잡석을 섞어 다져 놓았다.
퇴적토의 사이사이에서 몇 점의 와편이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주변에 이미 건물이 축조되어 있었고
이 9각 건물을 축조하기 위해 흙을 쌓아 대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지에서도 역시 출입구나 난방시설 등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발굴 도중 초석과 초석 사이에 연결되는 몇 개의 할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건물은 1층에도 벽이 있었던 건물이라고 여겨진다.
12각 건물지는 C지구 2호 건물지 동남쪽 22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전면발굴이 된 상태가 아니라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지상에 노출된 초석의 배열을 연결시켜 도상 복원을 해 본 결과 12각 건물임이 밝혀졌다.
그 구조 중심부에는 초석이 없고 중심에서 1.6m 거리에 12개의 초석이 있으며 그 바깥쪽 2.1m 지점에 12개의 초석이 놓여 있다.
이 두 번째 초석열에서 1.9m 지점에 다시 2.8m 간격으로 12개의 초석이 놓여 있다.
반지름은 5.6m이고 내부 면적은 30평 정도의 규모이다.
초석은 0.7~1.3m 크기로 산 정상부쪽은 비교적 작은 것을 아래쪽으로는 큰 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장대지로 추정된다.
산성내 남쪽 계곡을 막아서 형성된 저수지가 조사되었는데, 1·2차에 걸쳐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차 저수지는 산성 축조와 동시에 형성된것으로 규모는 54×30m이고, 평면은 타원형을 나타내고 있는데,
제3차 조사시에 이 1차 저수지에서 간지(干支)가 기록된 목간(木簡)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전면과, 측면 및 후면에 글씨가 씌어져 있는데, 전면에는 ‘戊辰年正月十二一朋南漢城道使…’
측면에는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 후면에는 ‘□□蒲□□□□□□…’라고 기록되어 있다.
2차 저수지는 1차 저수지가 자연 매립되고 난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규모는 18×27m이고 평면은 장방형을 하고 있다.
이 2차 저수지에서도 목간이 출토되었으나 판독되는 목간은 없었다.
저수지의 형성시기는 1차가 6세기 중엽, 2차는 7세기 후반~8세기초로 판단하고 있다.
이 산성 내에서는 3개소의 저장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2개소는 입구가 좁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복주머니 형태이고
1개소는 움집의 형태인데 인위적으로 매립되었다.
신앙유적(信仰遺蹟)은 4개소가 조사되었는데,
건물의 초석 상부 또는 초석에서 가까운 곳에 1.0~1.5m 크기의 큰 돌을 올려놓고
그 주변으로 돌아가며 잔돌을 쌓아 놓은 형태이다.
이 신앙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17마리 개체분의 말(馬)로 모두 파손되었다.
이 중 정선된 점토를 사용한 회색 연질의 토제품이 27점인데 머리, 몸통, 다리, 꼬리, 안장 등을 만들고
가는 세선으로 말안장과 고삐, 갈기를 잘 묘사하고 있으며,
철제품은 17점으로 주조(鑄造)와 단조(鍛造) 2가지 방법으로 제작하였다.
이 신앙유적은 무속(巫俗)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유물의 대부분은 와류와 토기류이며 금속류와 석기류도 몇 점씩 출토되었다.
기와는 회청색 또는 적갈색을 띠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암기와는 기울기가 없고 크기가 40~45㎝ 정도의 대형이며,
숫기와는 언강이 전혀 없는 토수기와들이다.
기와의 등무늬는 격자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사선이나 선조문 등도 많이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당초문과 복합문, 그리고 어골문도 보이고 있으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기와의 뒷면에는 포목문이 있다. 와당은 1점이 수습되었는데
굵은 모래가 많이 섞인 거친 태토에 10엽의 소판(素瓣)이 방사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방(子房)에서 14과의 연자(蓮子)가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토기류는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이 약 500여 점으로, 형태는 고배(高杯), 고배합(高杯盒),
합(盒), 개배(蓋杯), 완(盌), 단경호(短頸壺), 장경호(長頸壺), 병(甁), 도호(陶壺) 등 다양하다.
금속제품으로는 유공철부(有空鐵斧), 철촉(鐵鏃), 철정(鐵釘) 몇 점과 청동제 합개(盒蓋) 1점이 출토되었다.
석제품도 마제석촉, 방추차 등 몇 점이 출토되었으나 본 산성 유적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한 지진의례(地鎭儀禮)와 관계있는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토기들은 건물 축조시에 인위적으로 매납(埋納)한 것으로 기형은 완(盌), 합(盒), 호(壺), 병(甁) 등이며
공통적인 특성은 모두 구연부의 일부나 전체가 의도적으로 파손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제8차 조사에서는 ‘욕살(褥薩)’이란 고구려 관직명이 기록된 목간(木簡)과 고구려 자(尺)가 출토되었는데,
이때 조사된 유적문화층은 모두 7개층으로 구분된다.
윗부분인 1층부터 5층까지는 인화문토기 등 신라와 통일신라 때 유물만 나오고
목간과 고구려척 등이 나온 5번째 층은 고구려계 유물이 소수의 백제계토기류와 섞여 나오고 있다.
7번째 층은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오고 있는데, 이 석축산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겠다.
고구려자(尺)의 총길이는 36.1㎝로, 눈금이 끝에서 0.5㎝ 간격을 두고 시작하므로 이 길이를 제외한 35.6㎝가 실제길이다.
이 고구려척은 전체 세 구간으로 나뉘며 첫 구간은 5개의 마디로, 각 마디는 다시 5개의 눈금으로 나뉘어져 있다.
5개의 눈금이 모여 한 마디(寸)가 되고 이 5마디가 모여서 한 구간이, 다시 세 구간을 합해 한 자(尺)가 되는 셈이다.
제8차 조사시에 출토된 5~6세기경의 유물과 ‘욕살(褥薩)’이 기록된 목간,
그리고 고구려자의 출현은 3차 조사 때 출토된 고구려 성주를 뜻하는 ‘도사(道使)’가 기록된 목간과
아울러 살펴볼 때 당시 이성산성이 고구려 수중에 있었을 가능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성산성 유구 배치도
출처 : 고고학사전, 2001. 12., 국립문화재연구소
▼ 12시 27분 - 이성산성 제1저수지
▼ 12시 32분 - 이성산성 안내문
▼ 이성산성 제2저수지
▼ 12시 35분 - 이성산성 남문지 갈림길에서...
▼ 광주향교 방향으로...
▼ 12시 36분 - 차단봉을 통과하여...
▼ 12시 41분 - 카페 수막새
▼ 12시 44분 - 이성산성입구 교차로에서...
▼ 12시 47분 -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 13시 24분 - 위례역사길을 따라 광주향교 방향으로...
▼ 13시 26분 -
▼ 13시 29분 -
▼ 13시 34분 -
▼ 13시 25분 -
광주향교 [廣州鄕校]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에 있는 향교.
지정종목 :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경기문화재자료 제13호
지정일 : 1983년 09월 19일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향교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277-3 지도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마을 뒤쪽의 평지에 서남향으로 있다.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원래 고읍(古邑) 서쪽에 있던 것을 1703년(숙종 29)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외삼문과 대성전을 잇는 직선축상에서 앞으로는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 터가 있고
뒤로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서무가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의 주심포계(柱心包系) 맞배지붕집으로
앞면에는 개방된 툇간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민흘림기둥 위에 공포가 결구되어 7량(樑) 지붕 가구(架構)가 짜 올려져 있다.
내부에는 공자(孔子)와 4성(聖), 송나라와 조선의 20현(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공포의 형태나 가구 수법으로 보아 19세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동무·서무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민도리 맞배집으로 앞면에 개방된 툇간을 두었다.
내삼문은 솟을삼문인데 익공(翼工)의 형태로 보아 18세기 초의 건물로 추정된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중앙의 6칸 대청 좌우에 툇마루가 달린 1칸 반의 온돌방이 각각 있다.
서재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민도리집으로 내부에 온돌방이 있고 앞에 툇마루가 달려 있다.
[출처 : 두산백과]
광주향교 廣州鄕校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에 있는 향교.
시대 : 조선
문화재 지정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호
성격 : 향교
유형 : 유적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분야 : 교육/교육
내용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주심포(柱心包)계통의 맞배지붕인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수복실(守僕室)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있으며,
1명의 전교(典校)와 수명의 장의(掌議)가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3시 37분 - 교산교
▼ 13시 24분 - 덕풍천
▼ 13시 43분 -
▼ 13시 43분 -
▼ 13시 48분 -
▼ 13시 51분 - 선법사 입구에서...
▼ 13시 52분 -
▼ 위례둘레길(객산) 방향으로...
▼ 13시 54분 - 선법사
▼ 13시 59분 - 병풍바위
▼ 14시 03분 -
▼ 14시 07분 -
▼ 14시 10분 -
▼ 14시 11분 - 선법사/샘재 갈림길에서...
▼ 14시 21분 - 휴식을 마치고 객산 방향으로...
▼ 14시 25분 - 객산 갈림길
▼ 14시 25분 -
▼ 14시 30분 - 객산 정상
객산(客山)
객산(客山)은 해발 301m로 교산동과 천연동, 하사창동, 하산곡동을 끼고 있다.
정상에서 보면 동(東)으로는 검단산, 서(西)로는 금암산, 이성산과 서울시가지,
남(南)으로는 남한산성, 북(北)으로는 한강을 낀 하남시 전경이 눈앞에 다가온다.
여기서부터 남한산성까지는 완만한 능선길로 비탈진 곳이 없어 마치 평지를 걷는 것 같다.
객산은 옛날 마귀할멈이 안양에 남산을 만들려고 이천(利川)의 도드람산을 떠서 치마폭에 싸가지고 가던 중,
너무 힘이 들어 이곳에 그냥 놓고 가서 생긴 산으로 객지에서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과,
옛날 지나는 길손이나 관아에 볼 일이 있어 왔던 사람들이 묵어갔던 객사가 산 밑 고을에 있었기에 객산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 14시 34분 - 위례둘레길(남한산성) 방향으로...
▼ 14시 35분 -
▼ 14시 38분 - 사미고개 위
▼ 14시 43분 -
▼ 14시 46분 - 사미고개
사미고개
하사창동과 하산곡동을 오가는 고개로, 새미재 또는 삼외고개라고도 한다.
객산과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주능선 중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곳으로,
고골 사람들이 광주나 이천 우(牛)시장에서 소를 가지고 올 때 이 길을 가장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 14시 48분 -
▼ 14시 52분 -
▼ 14시 56분 -
▼ 14시 59분 -
▼ 15시 00분 -
▼ 15시 06분 - 막은데미 고개
막은데미 고개
막은데미는 산이 앞을 막은듯하게 생겨서 붙여진 산곡초교 건너편 산동네를 말하며,
이 고개가 그 마을 뒤에 있어서 막은데미 고개라 부르고 있다.
▼ 15시 07분 -
▼ 15시 20분 -
▼ 15시 24분 -
▼ 15시 30분 - 하사창동 갈림길
▼ 15시 36분 - 새바위(좌측길)와 개구리바위(능선길) 갈림길에서...
▼ 좌측길 새바위 방향으로...
▼ 15시 37분 -
▼ 15시 39분 -
▼ 15시 40분 - 새바위
▼ 15시 43분 -
▼ 15시 45분 - 갈라진 이빨바위
▼ 15시 48분 - 상사창동 갈림길에서...
☞ 여기서 '위례둘레길(금암산-이성산성-객산-남한산성) & 위례역사길(이성산성-광주향교-선법사) 이어걷기' - 2부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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