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세계일주] 일본의 북알프스 다테야마 연봉을 걷다
울긋불긋 그림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다테야마 단풍 속으로
가을철 단풍으로 물든 미다가하라평원.
다테야마는 신이 빚어낸 걸작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곳이다. 봄에는 평균 7m, 적설량이 많은 해는 20m 이상의 설벽, 여름에는 시원한 물소리와 초록색의 숲, 가을에는 초록, 빨강, 노란색이 어우러진 최고의 단풍을 즐기며 트레킹할 수 있다. 후지산, 하쿠산과 함께 일본의 3대 영산으로 불린다. 형형색색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면서 가을을 만끽하기에는 다테야마보다 더 근사한 곳을 찾기 쉽지 않다. 불타는 듯한 다테야마의 가을 단풍 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북알프스 다테야마 환종주
일본의 북알프스 다테야마는 봄이 되면 열리는 설벽으로 유명하지만, 가을에는 단풍과 함께 대자연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일본 북알프스는 기후현, 도야마현, 나가노현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는 히다산맥飛騨山脈을 말한다. 북알프스 산맥 최북단에 있는 다테야마는 3,000m급의 봉우리들이 남북으로 이어진 연봉이다. 무로도(2,450m)에서 가장 북쪽의 쓰루기다케劍岳(2,999m)부터 조도야마浄土山(2,831m)까지의 산군 전체로 오야마雄山(3,003m)와 오난지야마大汝山(3,015m)가 주봉이다. 오야마는 일본인에겐 신앙의 성지로 후지산藥師岳, 하쿠산白山과 함께 일본 3대 영산靈山 중 하나이다.
다테야마에서 당일 산행을 즐기기 위한 최적의 코스를 고민한 결과 라이조사와雷鳥沢캠핑장에서 출발해 쓰루기고젠劍岳前(2,777m), 벳산別山(2874m), 마사고다케真砂岳(2861m), 오야마, 오난지야마, 조도야마를 거쳐 라이조사와캠핑장으로 돌아오는 다테야마 환종주를 선택했다. ‘검劍’이라는 이름처럼 무척 험난한 쓰루기다케도 포함하고 싶었지만 당일 산행으로는 무리였다.
다테야마 환종주를 위한 전초기지는 라이조사와캠핑장. 고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푸근하고 배수도 잘된다. 야영장으로서 아주 기본적인 것만 갖추고 있지만, 다테야마 연봉을 조망하기에 최고의 장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테야마 연봉들만 바라봐도 너무나 행복한 곳이다.
벳산에서 조망하는 다테야마의 풍경.
밤새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 ‘혹여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산행을 하지 못할까?’ 걱정하며 밤을 지새우고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하산하기로 마음먹는다. 다행히 새벽에 비는 멈추었고 산행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다테야마 환종주는 거리 14km 내외이지만 해발 2,800m대 산을 6개나 넘어야 하니 난이도는 상당하다. 그야말로 업다운이 장난이 아닌 코스이다.
라이조사와캠핑장 앞의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쓰루기고젠 방향을 따라가면 다테야마 연봉들의 능선을 따라 갈 수 있고, 라이조사와캠핑장으로 원점회귀할 수 있다. 북유럽에서는 등로에 ‘T’를 표시해 두어서 편하게 산행했는데 일본은 바닥이나 돌에 화살표를 그려 놓았다. 화살표만 따라가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빗물을 머금은 울긋불긋 단풍들은 수줍은 소녀의 발그스름한 볼 같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고 서늘한 바람까지 불어 주니 산행에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다만 뿌연 안개로 시야가 조금 답답할 뿐이지만 이마저도 감사하다.
쓰루기고젠까지는 엄청나게 가파른 오르막. 대관령 고갯길처럼 계속 오르기만 한다. 함께 걷는 경환씨는 유독 힘들어한다. 산행 중 잠시 하늘이 열릴 때는 발 아래로 펼쳐진 무로도를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잠시 눈을 감는다. 2km 채 안 되는 거리를 올라가는 데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경환씨와 보조를 맞추어야 하니 빨리 진행하기도 어렵다.
쓰루기고젠산장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하니 “9시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아침 식사를 해야 산행에 무리가 없는데? 기다리는 동안에 쓰루기고젠을 다녀오기로 한다. 구름이 흘러갔다가 다시 오고 쓰루기다케가 구름에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반복 한다. 몽환의 세계이다. 발길을 떼기 어렵다. 저 아래는 라이조사와캠핑장. 내 텐트도 보인다. 쓰루기고젠의 높이는 2,792m. 다테야마 연봉 중 내가 밟은 첫 번째 산이다. 저 멀리 뾰족하게 바위들이 솟은 산이 쓰루기다케. 바위들이 마치 칼처럼 솟아 있어서 산의 이름도 劍岳인가보다. 눈으로만 밟아보고 쓰루기고젠산장으로 돌아간다.
신사가 있는 오야마 정상의 모습.
쓰루기고젠산장의 아침 식사는 우동사발면. 짜지도 않고 어찌나 맛난지. 평소엔 컵라면 국물은 거의 먹지 않는데 오늘은 국물도 남기지 않았다. 아침 식사도 든든하게 했으니 다테야마의 주봉인 오야마를 향해서 출발한다. 능선 위로 보이는 등로를 따라 걷는다. 다테야마의 최고봉인 오난지야마 바로 직전의 후지노리다테富士(2,861m)에 도착하니 날이 맑아진다.
다테야마 연봉의 봉우리를 한 개씩 넘을 때마다 오르내림이 무척 심하다. 역시 최고봉으로 이르는 길은 험하다. 날씨가 맑아지고 해발고도가 높아지니 햇살은 무척 뜨겁지만 더욱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더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다. 오난지야마로 오르면서는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곳을 걷게 되어 고산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각자의 컨디션을 유의해야 하는 구간이다. 오난지야마의 정상은 많아야 20여 명 앉을 수 있는 바위봉우리. 바위에 앉아서 구로베호수를 조망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미쿠리가이케 연못을 바라보면서 오야마로 향한다. 오야마 정상에는 신사가 있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 신사 안에서 정상 인증사진은 담지 않고 산장으로 내려와 북알프스의 파노라마를 바라보며 감탄사만 연발한다. 조도야마 너머로는 운해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발길이 급해진다.
오야마 정상에서 이치노코시一の越산장까지 내려가는 길은 평균 경사가 30도가 넘고 부서진 바위가 많아서 상당히 위험하다. 올라오는 이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자칫 잘못하다가 미끄러지면 내 다리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조도야마를 경유해 무로도까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려면 조금 서둘러야 하는데 길까지 험하다. 긴장감이 감돈다.
이치노코시산장으로 하산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오야마로 빨려 들어가는 구름의 모습에 전율이 느껴진다. 마치 구름 제왕이 세상의 모든 구름을 불러들이는 것 같다. 가히 장관이다. 단풍의 고혹적인 붉은빛이 나의 시선을 그대로 멈추게 한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이치노코시산장에서 무로도로 하산하므로 조도야마로 향하는 등로에는 등산객들이 전혀 없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저 아래 무로도가 보이니까. 오히려 조용하게 다테야마를 한발 한발 소중하게 느끼며 걷는다.
다테야마 환종주를 마치고 라이조사와 캠핑장에서 휴식하고 있는 필자.
조도야마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대로 운해는 파도처럼 넘실댄다. 이렇게 멋진 운해를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발아래 세상은 온통 하얀 구름으로 덮여 있다. 이 멋진 모습을 홀로 보기가 아쉽다. 이럴 때 누군가 곁에 있다면 그 감동은 배가 될 터인데. 조도야마에서 무로도 방향으로 걸어가던 중에 일본인 한 분을 만났다. 나를 부르더니 “이곳에서 무로도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 이치노코시산장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라고 했다. 지도에는 분명 길이 있는데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초행길에 길이 없는지 있는지 확인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아쉽긴 하지만 이치노코시산장으로 되돌아와서 무로도로 하산한다. 눈과 단풍이 한 공간 안에 멋지게 어우러진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상상조차 가능하지 않은 풍광이다.
미쿠리가이케ミクリガ池. 반경 631m, 깊이 15m의 화구호로 겨울에 내린 눈이 녹아서 흘러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무척이나 물이 맑았다. 미쿠리가이케는 연못 중간에 길이 있다, 그 길을 산책하면서 연못의 아름다움에 빠진다. 천상의 세계로 들어온 듯하다. 다테야마의 산들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다. 미쿠리가이케를 지나면 그보다 훨씬 작은 연못인 미도리가이케ミドリガ池. 위에는 눈이 덮여 있는 알록달록 단풍 산이 더욱 진한 가을풍경으로 물에 반영되어 있다. 크기는 작아도 아름다움은 더욱 진하다.
환종주의 마지막 코스인 지코쿠타니地獄谷가 가까우니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계곡물에서 올라오는 자욱한 수증기가 가득하다. 아이슬란드의 화산과 유사한 풍광이다. 다테야마는 트레킹의 마지막까지 정말로 다양한 즐거움을 준다.
다테야마 트레킹의 대미는 산행을 마친 후 해발고도 2,500m에서 즐기는 온천욕. 한 시간 정도 쉰 후에 라이조사와산장의 온천장으로 들어선다. 따스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는다. 산행 중에 보았던 다테야마 연봉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간다. 다시 길을 걷는다. 지나온 길들의 모습이 마치 비디오처럼 재생된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무로도에서 라이조사와 캠핑장으로 내려오는 등산객들.
한 폭의 유화 속으로 들어서다
텐트를 철수하고 라이조사와캠핑장부터 마쿠리가이케를 경유해서 텐구다이라天狗平까지 걷기로 일정을 수정했다. 상상 이상으로 화려하게 물든 다테야마의 단풍은 언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스쳐 지나가고 싶지 않았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길은 미끄럽지만 박배낭을 메고 걷는다. 다른 이들은 모두 버스로 이동하는 구간이다.
시야가 뻥 뚫린 들판엔 우리들만이 있다. 천상의 화원에 소풍 나온 이들이다. 등에 멘 배낭은 소풍 배낭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들길에 핀 꽃 한 송이, 풀 하나를 보면서 나오는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산은 누군가 울긋불긋하게 수채화를 그려놓은 것처럼 곱고 고운 꼬까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따라 두둥실 떠다니다가 산을 휘감고 있는 운무에 잠시 기대고 누워 본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도야마로 돌아온 다음날 일정은 시내 관광. 그러나 모두들 어제 두고 온 다테야마가 그리웠다. 특히나 텐구다이라까지 걸었던 그 길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일정을 급히 변경해 어제 보았던 수채화를 다시 보러 가기로 했다. 오늘은 텐구다이라에서 미다가하라까지. 미다가하라는 람사르 협약에 등재된 고원 습지로 해발고도 1,600~2,100m의 높은 곳에 있다. 10만 년 전 화산 폭발 후 용암 축적에 의해 형성된 곳이다. 다테야마 숭배자들은 미다가하라에서 텐구다이라까지 수행하면서 걷는다고 한다.
광대한 습지에 나무로 된 길이 잘 정비되어 있는 미다가하라평원의 산책로.
텐구다이라에서 내려오니 해발고도가 낮아질수록 단풍색이 더 진하고 화려하다. 습지에는 다양한 야생화까지 반겨준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최고의 단풍이다. 광활한 습지에는 스웨덴의 쿵스라덴처럼 걷는 이들이 불편하지 않고 자연도 아프지 않도록 나무만 사용한 데크 길이 있다. 길은 거의 평지에 가까워서 너무나 편하게 화려한 단풍을 즐길 수 있다. 단풍, 구름, 하늘을 바라보며 다테야마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암릉 구간이 나타났다. 쇠로 만든 밧줄을 잡고 조심조심 내려간다. 아찔할 만큼 위험하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다. 게다가 지금은 박배낭도 없이 자유롭게 걷고 있으니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다. 가을 소풍을 즐기다 보니 오후 3시가 훌쩍 넘어섰다. 이미 10km 이상 걸었어도 전혀 지치거나 힘들지 않다. 걸을수록 더 걷고 싶은 길이다.
소묘폭포는 꼭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개방 시간이 오후 6시. 단풍놀이에 취해서 걷다 보니 소묘폭포까지 가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다. 어쩔 수 없이 중간에 트레킹을 포기하고 코보KOBO에서 다테야마로, 다테야마에서 소묘폭포주차장으로 이동한다. 주차장에서 전력 질주를 해서 다행히 문 닫기 전 소묘폭포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가장 긴 350m의 폭포는 총 4단으로 나뉘어 있다. 가까이 가니 엄청난 굉음이 들린다. 물살은 또 어찌나 세게 튀기는지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자칫 방심하다가는 물세례를 받기에 십상이다. 웅장하고 거대함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쓰루기고젠 산장 앞에 있는 손으로 그려진 다테야마 지도.
다양한 걷는 즐거움을 선물하는 다테야마
히말라야나 알프스에 버금가는 절경을 가지고 있는 다테야마에서는 주봉인 오야마를 오르는 것 외에도 다양한 트레킹 코스가 있어서 초보자부터 전문 산악인까지 만족할 만한 트레킹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고도가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1시간 내외의 미쿠리가이케 트레킹 후 온천욕을 즐기거나, 지고쿠타니부터 텐구다이라까지 가벼운 고원트레킹을 선택할 수도 있고, 산장에 앉아서 한 폭의 유화처럼 펼쳐진 3,000m급 다테야마 연봉을 눈으로 즐기며 힐링할 수도 있다.
*차마고도 답사기는 필자가 코로나19 및 한일관계 경색 이전에 방문한 내용을 기초로 집필되었습니다.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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