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태실] 태를 잘 보관하는 일이 아이의 미래 결정짓는다 믿었죠
조선 왕조의 태실
▲ 경북 성주군의 세종대왕자 태실(胎室). 세종대왕자 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왕자 18명의 태실과 단종의 태실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모여있어요. /남강호 기자
왕실 자손의 '태'를 묻는 독특한 풍습
세계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 왕실의 독특한 문화가 바로 태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실을 간단히 설명하면,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했을 때 그 태(胎)를 길지(吉地·풍수지리에서 후손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믿는 터)에 묻고 만든 시설이에요. '태'라는 것은 태반이나 탯줄처럼 태아를 둘러싼 조직을 말하죠. 그런데 이것을 왜 길지에 묻고 관련 시설을 세웠던 것일까요? 그것은 '생명의 시작을 함께하는 태는 아이의 운명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답니다.
왕실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면, 아기의 태는 즉시 백자 항아리에 소중하게 담기게 됐어요. 그리고 미리 점지해 놓은 길방(吉房·길한 방)에 뒀다가 탄생 3일째 되는 날 태를 꺼낸 뒤 깨끗이 씻었습니다. 항아리 바닥에 동전 한 닢을 넣고 기름종이와 남색 명주로 항아리를 덮은 뒤 붉은색 끈으로 묶었습니다. 이처럼 정성스럽게 밀봉한 항아리, 즉 태항아리를 땅에 묻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전국에서 이름난 길지(명당)를 찾았죠. 이렇게 묻는 것을 태봉(胎封)이라 했고, 묻은 곳을 태실이라고 했어요.
"생명 존중이라는 보편적 가치 구현"
조선 왕실에선 이렇게 출산 이후 태를 잘 갈무리(정리하거나 간수함)하는 일이 아기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여겼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먼저 땅에 묻는다는 게 현대인의 시각으론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탄생과 생명의 시작이라는 데 커다란 의의를 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실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서양은 물론 인근 중국·일본 등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생명 존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구현에 부합한다"고 말합니다.
태실은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습니다. 왕릉이라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한양(지금의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들어야 했지만 태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확인된 태실은 모두 182곳으로, 경북 101곳, 경기도 65곳, 충남 16곳 등입니다. 이 중에서 24곳이 보물·사적 등 국가지정문화재인데, 보물로 지정된 곳은 충남 서산의 명종 태실과 경북 영천의 인종 태실입니다.
지난해 8월 보물로 지정된 인종 태실은 다른 태실보다 규모가 큰 데다 '세부 장식이나 조각 기법이 우수해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 경북 성주에 있는 세종대왕자(세종대왕의 왕자) 태실은 세종대왕의 여러 왕자 중 문종을 제외한 태실 18기와 단종의 태실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태실에 깃들었던 어두운 역사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아버지 세종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1442년(세종 24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아들들 태실을 성주에 모으도록 한 것이죠. 그런데 세종의 둘째 아들인 7대 세조 임금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성주 태실에는 한바탕 참사가 닥치게 됩니다. 1458년(세조 4년), 세조가 임금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세조의 동생 안평대군·금성대군과 한남군·화의군 등의 태실이 왕명에 의해 훼손됐습니다. 형제의 태를 한 장소로 집결시켜 서로 우애를 잃지 않을 것을 바랐던 아버지 세종의 뜻과 달리, 권력을 다투는 과정에서 이미 죽였거나 유배를 보낸 동생들의 태실마저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태실이 또 한번 위기를 맞은 건 1920년대 말 일제에 의해서였습니다. 총독부는 '태실 관리가 미흡해서 훼손이나 도난의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전국의 태실 54곳을 파내 태항아리를 꺼냈던 것입니다. 대신 경기 고양의 서삼릉에 태실 54개를 집단 조성해 이곳으로 모두 옮겼죠. 이에 대해 일각에선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만행이었다' '태항아리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술수였다'고 보기도 하죠. '관리의 효율성은 높아졌을 수 있지만 태실 본래의 역사적 맥락은 훼손됐다'는 냉정한 평가도 있습니다.
광복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서삼릉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태항아리들을 수습했고, 이후 문화재청 산하 기관인 국립고궁박물관이 이 항아리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태항아리는 용도를 떠나 그 자체로도 훌륭한 도자 문화유산으로 여겨집니다.
[숙종 임금의 태항아리]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은 2021년 9월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로 조선 19대 임금 숙종(재위 1674~1720)의 태항아리를 선정했어요. 태항아리는 태를 담는 작은 내(內)항아리와 그 항아리를 담는 커다란 외(外)항아리로 구성됐는데, 숙종 태항아리의 높이는 외항아리가 31.2㎝, 내항아리가 17.3㎝입니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살아있는 백자 항아리로 평가되죠.
태항아리는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묻혔는데, 태지석이란 태어난 사람이 누구이며 언제 태어났는지를 새겨 놓은 돌입니다. 숙종의 태지석엔 이렇게 적혀 있어요. '辛丑年(신축년) 八月(팔월) 十五日(십오일) 卯時生(묘시생) 元子(원자) 阿只氏(아지씨) 胎(태).' 신축년인 1661년(현종 2년) 8월 15일, 오전 5~7시에 해당하는 묘시에 태어난 '원자 아지씨'의 태라는 것이죠. '원자'는 왕비가 낳은 맏아들(적장자)로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아지씨'는 우리말 '아기씨'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사실 태지석에 '원자 아기씨'라고 적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왕조에서 드문 경우입니다. 조금 의외일 수도 있겠는데, 조선 역대 임금 27명 중에서 원자로 태어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숙종과 연산군(10대), 인종(12대), 순종(27대)까지 4명뿐입니다. 출생 당시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거나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4명 중에서도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거나(연산군) 일찍 죽거나(인종) 아예 나라가 망하지(순종) 않고 오래 왕 노릇을 했던 사람은 숙종밖에는 없었어요.
▲ 경기 고양 서삼릉 내 태실. 전국에서 옮겨진 54기의 태실이 집단 조성돼 있습니다. /고운호 기자
▲ 숙종 임금의 태항아리와 태지석(胎誌石). /문화재청
▲ 백자로 만든 태항아리. 제작 시기를 명시한 태지석이 함께 발견되지 않아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 1581년(선조 14년) 만들어진 태지석.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안영 기자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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