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 전북의 고대 성곽] 백제 지방 통치의 거점… 가야·신라와 접전 흔적도 남아
전북의 고대 성곽
▲ 전북 장수 합미산성의 돌로 쌓은 성벽. 둘레가 443m에 달합니다. /국립익산박물관
산성(山城)이 발달한 한반도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각종 방어 시설이 만들어졌어요. 이 시기 벼농사가 본격화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발생했고, 이를 둘러싼 집단 간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집단을 보호해야 했거든요. 부여 송국리유적이나 울산 검단리유적을 보면 기원전 5~6세기부터 마을 외곽을 따라 커다란 도랑을 파거나 목책(木柵)으로 불리는 커다란 나무 울타리를 세워 방어력을 높였다는 걸 알 수 있죠.
성곽의 축조는 '고대국가 형성의 지표'로 이야기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대규모 성곽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을 장기간 동원하여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과 뛰어난 토목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하거든요. 삼국(三國)은 일찍부터 성곽을 축조했지만 입지나 크기, 축조 기법·재료 등에서 차이가 있어요.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높은 산지에 돌을 이용해 석성(石城)을 쌓았어요. 백제는 풍납토성처럼 한강 주변의 평지에 흙을 이용해 토성(土城)을 쌓았지요. 신라는 하천을 낀 낮은 구릉에 흙과 돌을 이용해 성벽을 쌓다가 점차 돌을 이용한 산성을 많이 만들었어요.
성곽은 자리하는 위치에 따라 평지성과 구릉성, 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평지성이 대부분인 중국·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산성(山城)이 많아요.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성곽은 2100여 개가 알려져 있는데 그중 산 정상부나 경사면을 이용해 쌓은 산성이 1200개 정도로 절반이 넘어요. 한반도는 국토의 70%가 산지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산성을 쌓는 기술이 발달했어요.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서 성을 쌓게 되면 성벽을 만드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어요.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곳에 성을 쌓으면 적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한 장소를 선점해 소규모 병력으로도 효과적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답니다.
백제 지방 통치의 거점
전북 지역의 성곽은 지금까지 200여 개소가 넘게 확인됐어요. 이 중 실제 발굴된 게 40여 개이고요. 이러한 성곽이 있는 곳은 산과 평야 등 지형을 기준으로 크게 동부 산악 지대와 서부 평야 지대로 나눌 수 있죠. 그리고 금강과 섬진강·동진강·남강 등 큰 물길을 기준으로 세분할 수 있어요. 큰 산과 강물 사이에는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는 교통로가 발달했고, 중요한 길목에는 행정과 군사적인 기능을 갖춘 중요한 성곽들이 자리해요.
백제 당시 전북 지역에서 가장 많은 성곽이 축조된 지역은 익산 왕궁리유적을 둘러싼 주변 지역이에요. 익산 왕궁리유적은 무왕(재위 600~641) 때 백제의 왕궁이 있던 곳이죠. 그 인근에는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와 왕실 사찰인 제석사, 무왕의 무덤인 쌍릉이 자리하고 있어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에요. 왕궁리유적 주변에는 익산토성과 금마 도토성, 미륵산성 등을 쌓아 그런 국가적 시설들을 보호했어요. 그중 익산토성은 오금산 정상부와 능선부에 가공한 돌을 이용해서 성벽을 쌓았는데 둘레가 680m에 달해요. 익산토성 내부에서는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무늬를 가진 수막새(처마 끝을 장식하는 기와)와 토기가 다수 출토됐어요.
동진강 남쪽에 자리한 정읍 일대에는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백제 성곽이 확인됐어요. 둘레 1050m의 고사부리성은 3개의 성문과 물을 모아두는 집수지(集水地), 각종 건물지가 발견됐는데 백제 때 만들어진 '상부(上部)'와 '상항(上巷)'이 적힌 기와와 목제품이 출토되기도 했어요. '상부'와 '상항'은 백제의 수도 사비도성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이곳에 당시 수도에 살던 백제 중앙 세력이 어떤 형태로든 연관돼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요.
고사부리성은 백제 사비 시기 지방 통치 체제의 핵심을 이루는 5방성 가운데 중방성(中方城)이 있었던 곳이에요. 백제는 지방의 거점 지역에 중방·동방·서방·남방·북방 등 5방성을 설치해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어요. 그중 중방성은 수도에서 남쪽으로 260리(里) 떨어져 있고, 사방 150보(步) 크기이며, 1200명의 군사가 둘러싸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가야·신라와의 접전(接戰) 흔적
섬진강 유역에는 진안 합미산성과 와정토성, 임실 성미산성, 장수 봉서리산성과 삼봉리산성, 남원 아막성 등 여러 성곽이 분포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성곽들은 백제·가야·신라 세 나라가 치열하게 각축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전북 동부 지역은 5세기 중반 이후 백제가 아닌 가야 세력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에요. 남원 월산리고분군이나 장수 삼봉리고분군은 이 지역까지 진출한 대가야 세력이 남긴 고분들이죠. 특히 삼봉리고분군과 인접한 삼봉리산성의 경우 성벽의 축조 기법에서 볼 때 가야가 쌓은 산성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백제는 무령왕이 즉위한 6세기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섬진강 유역 진출을 시도했어요. 이 때문에 진안 황산리고분군 안에서는 백제 토기와 가야 토기가 함께 발견되고, 진안 와정토성 내부에서는 두 나라의 격전을 보여주듯 대규모 화재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어요.
562년 대가야 멸망 이후, 전북 동부 지역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완충 지대가 사라져버렸고, 그로 인해 백제와 신라는 이 지역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게 됐어요. 602년 백제 무왕은 보병과 기병 4만명을 동원하여 아막성을 공격했지만 신라의 끈질긴 저항으로 실패했어요. 616년 재차 아막성을 공격하여 이를 확보했고, 그 뒤 경남 함양과 합천 지역까지 진출하게 됐어요. 이러한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원 아막산성에 대한 발굴에서는 신라 토기와 백제 토기가 시기를 달리해 발견됐어요. 아막산성에서 물을 저장하던 집수지 안에서는 소와 말 등 가축 뼈와 더불어 멧돼지·사슴·곰 등 야생동물의 뼈가 함께 발견돼 당시 사람들의 먹거리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각종 방어 시설이 만들어졌어요. 이 시기 벼농사가 본격화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발생했고, 이를 둘러싼 집단 간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집단을 보호해야 했거든요. 부여 송국리유적이나 울산 검단리유적을 보면 기원전 5~6세기부터 마을 외곽을 따라 커다란 도랑을 파거나 목책(木柵)으로 불리는 커다란 나무 울타리를 세워 방어력을 높였다는 걸 알 수 있죠.
성곽의 축조는 '고대국가 형성의 지표'로 이야기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대규모 성곽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을 장기간 동원하여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과 뛰어난 토목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하거든요. 삼국(三國)은 일찍부터 성곽을 축조했지만 입지나 크기, 축조 기법·재료 등에서 차이가 있어요.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높은 산지에 돌을 이용해 석성(石城)을 쌓았어요. 백제는 풍납토성처럼 한강 주변의 평지에 흙을 이용해 토성(土城)을 쌓았지요. 신라는 하천을 낀 낮은 구릉에 흙과 돌을 이용해 성벽을 쌓다가 점차 돌을 이용한 산성을 많이 만들었어요.
성곽은 자리하는 위치에 따라 평지성과 구릉성, 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평지성이 대부분인 중국·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산성(山城)이 많아요.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성곽은 2100여 개가 알려져 있는데 그중 산 정상부나 경사면을 이용해 쌓은 산성이 1200개 정도로 절반이 넘어요. 한반도는 국토의 70%가 산지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산성을 쌓는 기술이 발달했어요.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서 성을 쌓게 되면 성벽을 만드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어요.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곳에 성을 쌓으면 적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한 장소를 선점해 소규모 병력으로도 효과적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답니다.
백제 지방 통치의 거점
전북 지역의 성곽은 지금까지 200여 개소가 넘게 확인됐어요. 이 중 실제 발굴된 게 40여 개이고요. 이러한 성곽이 있는 곳은 산과 평야 등 지형을 기준으로 크게 동부 산악 지대와 서부 평야 지대로 나눌 수 있죠. 그리고 금강과 섬진강·동진강·남강 등 큰 물길을 기준으로 세분할 수 있어요. 큰 산과 강물 사이에는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는 교통로가 발달했고, 중요한 길목에는 행정과 군사적인 기능을 갖춘 중요한 성곽들이 자리해요.
백제 당시 전북 지역에서 가장 많은 성곽이 축조된 지역은 익산 왕궁리유적을 둘러싼 주변 지역이에요. 익산 왕궁리유적은 무왕(재위 600~641) 때 백제의 왕궁이 있던 곳이죠. 그 인근에는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와 왕실 사찰인 제석사, 무왕의 무덤인 쌍릉이 자리하고 있어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에요. 왕궁리유적 주변에는 익산토성과 금마 도토성, 미륵산성 등을 쌓아 그런 국가적 시설들을 보호했어요. 그중 익산토성은 오금산 정상부와 능선부에 가공한 돌을 이용해서 성벽을 쌓았는데 둘레가 680m에 달해요. 익산토성 내부에서는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무늬를 가진 수막새(처마 끝을 장식하는 기와)와 토기가 다수 출토됐어요.
동진강 남쪽에 자리한 정읍 일대에는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백제 성곽이 확인됐어요. 둘레 1050m의 고사부리성은 3개의 성문과 물을 모아두는 집수지(集水地), 각종 건물지가 발견됐는데 백제 때 만들어진 '상부(上部)'와 '상항(上巷)'이 적힌 기와와 목제품이 출토되기도 했어요. '상부'와 '상항'은 백제의 수도 사비도성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이곳에 당시 수도에 살던 백제 중앙 세력이 어떤 형태로든 연관돼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요.
고사부리성은 백제 사비 시기 지방 통치 체제의 핵심을 이루는 5방성 가운데 중방성(中方城)이 있었던 곳이에요. 백제는 지방의 거점 지역에 중방·동방·서방·남방·북방 등 5방성을 설치해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어요. 그중 중방성은 수도에서 남쪽으로 260리(里) 떨어져 있고, 사방 150보(步) 크기이며, 1200명의 군사가 둘러싸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가야·신라와의 접전(接戰) 흔적
섬진강 유역에는 진안 합미산성과 와정토성, 임실 성미산성, 장수 봉서리산성과 삼봉리산성, 남원 아막성 등 여러 성곽이 분포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성곽들은 백제·가야·신라 세 나라가 치열하게 각축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전북 동부 지역은 5세기 중반 이후 백제가 아닌 가야 세력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에요. 남원 월산리고분군이나 장수 삼봉리고분군은 이 지역까지 진출한 대가야 세력이 남긴 고분들이죠. 특히 삼봉리고분군과 인접한 삼봉리산성의 경우 성벽의 축조 기법에서 볼 때 가야가 쌓은 산성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백제는 무령왕이 즉위한 6세기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섬진강 유역 진출을 시도했어요. 이 때문에 진안 황산리고분군 안에서는 백제 토기와 가야 토기가 함께 발견되고, 진안 와정토성 내부에서는 두 나라의 격전을 보여주듯 대규모 화재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어요.
562년 대가야 멸망 이후, 전북 동부 지역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완충 지대가 사라져버렸고, 그로 인해 백제와 신라는 이 지역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게 됐어요. 602년 백제 무왕은 보병과 기병 4만명을 동원하여 아막성을 공격했지만 신라의 끈질긴 저항으로 실패했어요. 616년 재차 아막성을 공격하여 이를 확보했고, 그 뒤 경남 함양과 합천 지역까지 진출하게 됐어요. 이러한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원 아막산성에 대한 발굴에서는 신라 토기와 백제 토기가 시기를 달리해 발견됐어요. 아막산성에서 물을 저장하던 집수지 안에서는 소와 말 등 가축 뼈와 더불어 멧돼지·사슴·곰 등 야생동물의 뼈가 함께 발견돼 당시 사람들의 먹거리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답니다.
▲ 진안 황산리고분에서 출토된 백제토기(왼쪽)와 신라토기(오른쪽). /국립익산박물관
▲ 전북 지역 산성에서는 화살촉과 갈래창, 갈고리, 팔맷돌 등이 출토되어 치열했던 고대 전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요. 사진은 화살촉. /국립익산박물관
▲ 익산 낭산산성에서 출토된 백제 바람개비무늬수막새. /국립익산박물관
기획·구성=안영 기자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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