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동과 깨달음☞/☆ 깨우치는 한마디

나폴레옹

by 맥가이버 Macgyver 2005. 7. 29.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나폴레옹 Napoleon Bonaparte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라는 섬에서 1769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나폴레옹(이탈리아 어로 황야의 사자라는 뜻) 보나파르트.

가난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르시카섬은 14세기이래 이탈리아의 제노바령이었는데 18세기 초기부터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고, 18세기중엽부터는 P.파올리가 주도하였다.

 

보나파르트가(家)는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하여 서부의 아야초의 소(小)귀족 지주가 된 뒤,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샤를 보나파르트는 레티치아 라모리노와 결혼하여 파올리의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제노바가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양도하였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프랑스군에게 저항하다가 1768년에 패배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프랑스에 귀순했으므로 1779년 국왕의 급비(給費)를 받아 나폴레옹을 본토의 브리엔 군사학교에 보냈고, 84년에는 파리사관학교로 진학시켰다

 

〔프랑스 혁명〕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코르시카에서 국민병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파인 파올리와 대립하게 되자, 93년 마르세유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편협한 애향심을 버리고 <혁명프랑스>에다가 운명을 맡겼다. 열강이 혁명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자, 영국·에스파냐 함대가 폐쇄중인 툴롱항을 포격하여 해방시켰고, 그 후 여단장이 되었으며, 다시 왕당파의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진압·진정시켰다. 96년 3월 조세핀과 결혼하고, 27세인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군대는 원래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군 견제를 목적으로 편성된 것으로, 장비와 규율이 엉망이었으나, 1년간 연속된 전투 끝에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97년 캄포포르미오조약을 맺고 치잘피나공화국을 창설함으로써, 프랑스 국경 밖의 프랑스땅을 확보하였다.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인하여 그 때까지 방어적이었던 혁명전쟁은 침략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총재정부(總裁政府) 부내(部內)에서도 대영(對英)전략으로 인도항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집트원정이 고려되고 있었고, 이 작전도 나폴레옹에게 맡겨졌다. 그는 98년 5월에 툴롱을 출발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고 <피라미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만에서 영국 함대에 의하여 괴멸되었다. 유럽에서 제2대 프랑스대동맹이 결성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군대를 남기고 99년 10월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총재정부는 부르주아 세력과 보수세력에게 협공을 당했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성이 흔들렸고, 총재 시에예스 등은 정체(政體)변혁을 위하여 군사력을 필요로 하여 동년 11월 나폴레옹과 결탁하여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프랑스혁명기(期)는 끝이 나게 되었다.

1799년의 헌법 제정 단계 때부터 그는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사회적 성과를 보증하는 부르주아적 사회 안정을 지키기 위하여 강력한 정부를 염원하였다. 입법기관은 4원(四院)으로 분할되었고, 제1집정의 행정권이 강하여 그는 그 전제적 권력으로써 재정(財政) 확립을 위하여 프랑스은행을 설립하고 행정·사법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경찰력을 강화하였고, 1804년에는 민법전(民法典), 즉 나폴레옹법전 편찬을 끝내었다. 그는 또 곧 오스트리아군에 대해서 제2이탈리아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로마교황과의 종교협약을 성립시켰고, 이어서 영국과 아미앵조약을 맺음으로써 종신집정이 되었고, 스위스 및 독일 제후(諸侯)에게까지 지배의 손을 뻗치고, 국내에서는 왕당파를 탄압하더니 1804년 5월 황제로 추대된 뒤 이탈리아 왕을 겸했으며, 그 해 12월 2일 노트르담에서 대관식(그림)을 거행하였다. 이것이 제1제정(帝政)의 시작이다.

 

〔유럽정복〕

대륙의 여러 나라는 혁명의 영향, 프랑스의 경제 진출을 막기 위하여 나폴레옹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군대는 아직 봉건적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혁명이 창출한 근대적인 대국민군(大國民軍)에게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영국은 대륙시장을 자국의 국민산업을 위하여 확보하는 점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 대프랑스동맹을 맺어야만 할 위치에 있었다. 아미앵조약이 영국에 의하여 파기되고 1805년 제3 대프랑스대동맹이 성립되자, 그는 대영전략으로서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 불로뉴를 중심으로 <대륙군(大陸軍)>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출동했으므로, 울름회전(會戰)에서 이를 격파하기는 했으나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함대는 영국의 넬슨에게 격파되어, 결국 그 상륙작전은 좌절되었다. 한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황제의 양군은 합류하려고 서둘렀으므로 나폴레옹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빈을 점령하고, 곧 아우스테를리츠의 <삼제회전(三帝會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 독일에 대해서도 1806년에 16개의 영방(領邦)을 라인동맹으로 결성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켰다. 이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하여 공격적으로 되어버려 제4 대프랑스대동맹의 계기를 만들었다. 나폴레옹군은 동맹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 뒤,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을 추격해서 폴란드로 침입, 바르샤바대공국을 설립시키고 나서 1807년 러시아와 틸지트조약을 맺었다. 그 전에 그는 대륙봉쇄를 호령하는 베를린칙령을 발포하였다. 그것은 영국의 산업제품 및 식민지 물산(物産)을 수입하는 대륙시장을 폐쇄할 목적으로 발포된 것으로, 대영 전략의 최후수단이었다. 그 뒤 그의 군사적·정치적 과제는 이 대륙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는데, 대륙봉쇄는 본래 영국을 기점(起點)으로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경제유통을 프랑스제국(帝國)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흐름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봉쇄정책을 저버린 포르투갈에 대한 원정은 우선 에스파냐 점령, 그 뒤로는 에스파냐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고, 1809년 제5 대프랑스대동맹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로 원정을 하였고, 몇 차례의 큰 전쟁을 한 뒤 강화(講和)를 하였다.

 

〔몰락〕

1806년에서 10년까지 프랑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아, 국내외적으로 경제성장과 판도(版圖) 확장이 이어졌다. 나폴레옹도 40세 전후가 되면서 몸이 비대해지고 청년기의 예리함을 상실하였다. 궁정은 옛제도의 화려함을 띠게 되었고, 귀족 제도가 되살아났으며, 추종자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는 정복지에다가 가족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부장(部將)을 원수(元首)로 파견해 놓았으니, 이른바 가족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나라는 프랑스와 동맹국관계에 있는 나라였는데, 그 중에서도 러시아는 10년 말부터 반프랑스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국내 경제의 불황을 이유로 출병을 연기하고 있었으나, 결국 12년 6월 러시아원정길을 떠났다. 동맹국군을 합친 50만 병력으로 그 해 9월 모스크바에 도달했으나 러시아의 초토작전(焦土作戰)에 대응하지도 못한 채, 10월 무렵 퇴각을 시작하여 원정은 참담한 결과로 끝이 났다. 13년 에스파냐, 러시아,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나폴레옹 독재에 대한 민족의식에 눈을 떠, 국내개혁에 몰두하게 되었고, 제6 대프랑스대동맹이 민족해방을 위해서 결성되었다. 독일은 라이프치히에서의 해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4년 1월 동맹군은 프랑스로 침입하여 파리를 함락시키고 그 해 4월에 나폴레옹을 퇴위시켜 엘바섬으로 유배하였다. 그 후 부르봉 왕조 루이 18세의 왕정복고(王政復古)가 이루어졌고, 혁명에 의해서 획득한 것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한 부르주아와 농민들은 15년 3월 엘바섬에서 탈출·귀국한 나폴레옹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빈회의에 참가 중이던 여러 나라는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대를 출동시켰고, 같은 해 6월 워털루전투에서 참패한 나폴례옹은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 유해〕

앙발리드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된 앙발리드는 원래 루이 14세가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폐인이 된 수 천명의 병사들을 위하여 세운 요양소였다. 앙발리드는 1671∼1676년에 세워졌는데, 엄격하리만큼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장식이 없다. 이곳의 요양소로서의 기능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그가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둔지 19년 후인 1841년에 이곳, 앙발리드 중앙에 있는 돔 교회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은 군사 박물관,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 그리고 돔 교회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사 박 물관에는 전쟁기념품, 그림, 벽화 등이 전시되어 있고,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에는 나폴레옹이 정복한 나라들의 국기들이 깃발로 장식되어 있다.

 

나폴레옹의 대리석관  

나폴레옹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천재이며, 책략에 뛰어난 영웅이었다. 잇따른 전쟁을 통해 전 세계에 용맹을 떨쳤으나 워털루 싸움에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후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가 1821년 5월 5일 숨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이 죽은 지 19년 후인 1840년 12월 15일 루이 필립왕은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송환시킨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일곱 겹의 관속에 넣어졌는데 첫 번째 관은 주석, 두 번 째는 마호가니, 세 번 째와 네 번 째는 납, 다섯 번 째는 흑단, 여섯 번 째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졌다. 러시아에서 운반되어 만들어진 일곱 번 째 관은 대리석 관이며 녹색의 화강암 위에 얹혀있다. 이 대좌 밑 포석에는 그가 이끈 싸움터의 이름과 행적 등이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고, 유해 주위에는 그의 형제들과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장군들의 묘가 둘러싸고 있다.

'▣감동과 깨달음☞ > ☆ 깨우치는 한마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드리 햅번의 마지막 유언  (0) 2005.07.30
오프라 윈프리의 십계명  (0) 2005.07.30
나폴레옹 어록  (0) 2005.07.29
이순신 장군 어록 중에서  (0) 2005.07.28
친구(우정이란)  (0) 200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