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의 해를 맞는 첫 여행… 금빛 닭이 알을 품었다는 봉화 닭실마을
닭의 해를 맞는 첫 여행은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곳에서 미리 시작하기로 한다.
봉화 닭실마을이다. 한자 이름은 닭 유(酉) 고을 곡(谷), 유곡리.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안동 내앞마을과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이곳을 영남 4대 길지(吉地)로 꼽았다.
뒷산은 암탉이 알 품은 형상
앞산은 수탉이 알 지키는 모습
500년 이어온 안동 권씨 집성촌
35가구 모여 있어
집안 며느리들이 만든 한과 유명
전국에서 주문 들어와
울창한 솔숲, 살얼음 밑 계곡 물소리… 여기선 게을러도 좋다
내년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이다. 이제 열흘 남았다.
그리하여 닭의 해를 맞는 첫 여행은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곳에서 미리 시작하기로 한다.
봉화 닭실마을이다.
한자 이름은 닭 유(酉) 고을 곡(谷), 유곡리.
마을 사람들은 '달실마을'이라 부른다.
'닭'의 현지 발음이 '달'이다.
마을 뒷산은 암탉이 알을 품는 형상, 작은 논과 흐르는 내를 두르고 있는 앞산은 수탉이 날개를 펼쳐 알을 지키는 모습이다.
'금계포란(金鷄抱卵)' 지형이라 한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안동 내앞마을과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이곳을 영남 4대 길지(吉地)로 꼽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마을 앞뒤를 감싼 나지막한 구릉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에는 닭 모양 조형물을 머리에 올린 가로등이 늘어서 있다.
닭실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500년을 이어왔다.
기묘년인 1519년 사화(士禍)에 휘말린 충재(冲齋) 권벌(1478~1548) 선생이 이듬해 낙향해 터를 잡았다.
도승지와 예조참판 벼슬을 지낸 고위 관리였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권벌'을 검색하면 323건이 나온다.
"임금은 말을 할 때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수령들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날마다 말을 달려 사냥으로 일삼고 있다" 같은 바른말 많이 했다.
지금 살고 있는 35가구 마을 사람 모두 충재 선생 지손(支孫)이다.
마을에 있는 청암정(靑巖亭)은 충재 선생이 지은 정자. 500년 세월 견디고 아직도 우뚝하다.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 위에 주춧돌을 놓고 집을 올렸다.
19세 종손 권용철(44)씨는 "원래 일반인 출입을 허용하지 않다가 1970년대 이후 개방했다"면서
"하지만 일부 관광객이 정자 위에서 음식을 차려 먹는 등 훼손이 심해
지난해부터 정자 위로 올라가는 일을 다시 금하고 있다"고 했다.
허락을 얻어 정자 마루에 올랐다.
왼쪽 옆으로 마을 기와집 처마 선(線)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청암정 옆에는 충재박물관을 세웠다. 긴 세월 전해 내려온 유품 482점이 국가 보물로 등록되어 있다.
중종 2년인 1507년 과거 때 제출한 답안지도 볼 수 있다.
충재 선생은 선조 때 복권돼 영원히 제사를 받는 불천위(不遷位)에 올랐다. 4
대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반적 관례를 넘어 대대손손 제사를 지낸다.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음식을 만들었다.
제사상에 오르는 한과가 덕분에 유명해졌다. 1992년부터 상품이 됐다.
설이나 추석에는 전국에서 한과 주문이 줄을 잇는다.
평소에는 매주 목요일 하루 만들지만 다가올 설을 맞아 이제부터 매일 찹쌀 불리고,
반죽 빚고, 말리고, 지지고(튀기고), 조청 입히고, 튀밥을 묻힐 예정이다.
열아홉 고운 나이에 시집 온 이영자(78)씨는 "시집 온 이듬해부터 한과를 만들었다"면서
"그때 태어난 시동생이 벌써 환갑이 됐다"고 했다.
닭실한과 박정자(65) 회장은 "한과를 만드는 데 5일 걸린다"면서 "명절 앞두고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닭실마을은 봉화읍에서 약 2㎞ 떨어져 있다. 택시 타면 5분도 안 걸린다. 걸어서 가기로 했다.
봉화군은 5년 전 읍내에서 닭실마을 가는 길을 '솔숲갈래길'로 지정했다.
내성천에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 석천계곡을 지나는 길이다.
그런데 이정표를 따라가다가 낭패를 봤다.
두 번째 징검다리를 건너자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알 수 없었다.
봉화군청 문화관광과에 전화했다.
직원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을 인정한다"고 했다.
징검다리 건너 도로 위로 올라가야 한다.
길 건너 200m쯤 걸어 삼계교에서 오른쪽 석천계곡 방향으로 걷는다.
계곡엔 솔숲이 울창하다.
전날 내린 눈을 이고 있는 소나무가 선계(仙界)의 풍경을 자아낸다.
2~3분 걸으면 바위에 지렁이처럼 흘려 쓴 붉은 글씨 한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옆에 설명문이 없었다면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청하동천(靑霞洞天)'이다.
'하늘 위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라 한다.
충재 선생 5세손인 권두응(權斗應)이 쓴 글씨다.
기암괴석 많은 이 계곡에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았고,
서생들이 괴롭힘을 당하자 바위에 글씨를 새겨 필력(筆力)으로 도깨비들을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금 더 걸으면 계곡 물 흐르는 풍경 뒤로 기와집이 서 있다.
충재 선생 아들 권동보가 지었다는 석천정사다.
암반 위에 석축을 쌓고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었다.
권씨 집안 자제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책을 읽었을 터이다.
얇게 언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다.
닭실마을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30분이면 충분하다.
당초 닭실마을에서 하루 묵을 생각이었다.
고택인 추원재와 새로 지은 한옥 문행당이 숙박을 제공한다.
사전 예약을 하려 했으나 추원재는 지금 3년상 중이라 숙박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문행당은 겨울에는 쉰다고 했다.
권용철씨는 인근 바래미마을 토향고택을 추천했다.
한자 이름은 해저리(海底里).
닭실마을처럼 전통을 간직한 마을이다.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토향고택 주인 김종구(65)씨는 "닭실마을과 바래미마을은 '유해(酉海) 양촌'이라고 부를 만큼 봉화에서 유명한 양반가"라면서
"우리 집 증조할머니가 닭실마을에서 시집 오는 등 혼사도 많이 이뤄졌다"고 했다.
1800년대 지은 옛 기와집 사랑방에서 게으르게 책을 읽었다.
이불은 깨끗했고 구들은 따뜻했다.
토향고택(054-673-1112) 사랑채 10만원. 5만원 방도 있다.
미리 말하면 아침 식사(1만원)도 해준다.
주인 김종구씨는 도자기를 만든다. 직접 구운 도자기를 방에 놓았다.
닭실한과(054-673-9541) 4만5000원, 7만원, 9만원. 주문은 5~7일 전 해야 한다.
봉화는 송이버섯이 유명한 고장. 읍내에 들어서면 송이 모양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솔봉이 송이요리전문점(054-673-1090)에서 낸 송이돌솥밥(2만원) 뚜껑을 열었더니 얇게 썬 송이가 밥 위를 온통 덮고 있었다.
향긋한 송이 향이 퍼진다.
먼저 송이를 집어 소금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반찬도 정갈하다.
청량산 가는 길목에 있는 봉성면에는 솔봉숯불구이식당(054-674-3989) 등 돼지고기 구이집 여섯 곳이 몰려 있다.
봉성숯불단지라고 부른다.
20년 전까지 있었던 봉성장은 제법 큰 규모의 5일장이었다.
장이 설 때 화로에 구워내던 돼지고기 구이집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 했다.
소금구이 9000원, 양념구이 1만원.
소금구이는 솔잎 위에 구운 돼지고기를 얹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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