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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의 꽃이야기] 토종 봉선화 물봉선의 계절

by 맥가이버 Macgyver 2020. 9. 24.

[김민철의 꽃이야기] 토종 봉선화 물봉선의 계절

산 개울가마다 홍자색 물봉선… 고깔 모양 꽃통 앙증맞게 매달려
씨앗 강하게 튕겨내는 건 좋은 환경에 정착 바라는 모정
어릴 적 손톱 물들인 봉선화는 오래전에 귀화한 형제 식물

 

지난 주말 과천 서울대공원 둘레길을 걸었는데,

개울가마다 어김없이 홍자색 물봉선 천지였다.

꽃색이 가장 진한, 물봉선이 가장 예쁠 때였다.

 

꽃줄기가 위쪽에서 고깔 모양 꽃통을 매달고 있는 독특한 구조다.

사람 손을 타지 않는 곳에서 살기 때문에

등산하다 물봉선을 만나면 비로소 깨끗한 숲에 들어선 것 같다.

 

물봉선은 봉선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주로 산골짜기의 계곡 주변이나 습지에서 무리 지어 자란다.

높이는 60㎝ 내외인데 큰 것은 1m까지도 자란다.

 

꽃잎은 석 장인데, 아래쪽 두 장은 진한 홍자색으로 곤충이 내려앉기 좋게 내밀고 있다.

어느 분은 이 모습이 ‘이제 막 화장을 배우는 여인의 작은 입술처럼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꿀주머니는 뒤로 길게 뻗어 있는데 끝이 돼지 꼬리처럼 동그랗게 말린 것도 재미있다.

 

물봉선.

 

노랑물봉선.

얼핏 보면 그냥 홍자색 꽃으로 보이지만 꽃 안쪽을 들여다보면 화려하다.

꽃 안쪽에 흰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무늬가 있고 점점이 자주색 점까지 박혀 있다.

산골에 사는 물봉선의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고 할까.

 

야생화에 관심을 가진 후 가장 많이 찍은 야생화 열 개를 꼽는다면 아마 물봉선이 들어갈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산 어디를 가도 흔히 볼 수 있고,

또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꽃이기도 하다.

 

화단에 심는 봉선화와는 속(屬)이 같은 형제 식물이다.

봉선화는 어릴 때 손톱 물들인 추억의 꽃이지만 사실은 인도·동남아 원산의 귀화종이다.

물봉선이 우리 고유의 봉선화라고 할 수 있다.

 

원예종 봉선화(鳳仙花)는 꽃 모양이 머리와 발·꼬리를 세우고 있는 봉황과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봉선화가 귀화종이라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심은 기록이 있다고 하니

이 정도면 그냥 우리 식물이라고 보아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

 

/일러스트=이철원

물봉선과 봉선화의 속명(Impatiens)은 ‘참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열매 꼬투리가 작은 자극에도 터져 씨앗이 튕겨 나가 생긴 이름이다.

이 종류 영어 이름이 ‘터치미낫(Touch me not)’인 것도 이 때문이다.

 

봉선화 열매는 타원형으로 크고 털이 있지만

물봉선 열매는 작은 강낭콩처럼 길쭉하고 털이 없이 매끈하다.

둘 다 자극을 주면 터지지만 물봉선이 훨씬 민감하다.

 

씨앗을 받으러 가까이 다가가면 닿기도 전에 터져버리는 것 같다.

마치 가까이 가면 ‘흥~’ 하고 돌아서 버리는 도도한 아가씨 같다.

모기 잡듯 거의 양손을 모으고 다가가야 몇 개 건질 수 있다.

씨앗이 튕겨 나올 때 손바닥이 좀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다.

 

물봉선이 이처럼 강한 힘으로 씨앗을 튕겨내는 것은 씨앗이 좀 더 멀리 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새로운 양분이 있는 곳에 정착하라는 모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홍자색이 아닌 노랑물봉선도 산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봉선 비슷하게 생겼지만 꽃잎이 노랗고 자잘한 붉은 반점이 있다.

잎도 물봉선은 끝이 뾰족하지만 노랑물봉선은 둥글다.

꿀주머니도 말리지 않아 약간 엉성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봉선처럼 생겼는데 흰색 꽃이 피는 흰물봉선,

물봉선보다 짙은 자주색 꽃이 피는 가야물봉선도 있다.

 

봉선화.

물봉선은 비교적 흔한 야생화인데도 소설 속에서 찾기 어려웠다.

겨우 하나 본 것은 신경숙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였다.

 

1980년대 대학 생활을 보내는 청춘들 이야기다.

뜻밖에도 물봉선이 개울가가 아니라 시위대에 휩쓸려 다친 와중에 들른 꽃집에 등장했다.

 

“꽃집 안에는 싱싱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것들보다 시들어가는 꽃들이 많았다.

꽃이 지고 잎조차 시들고 있는 물봉선이며 물달개비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소설엔 여주인공 윤이 뒷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려다 들켰을 때

아빠가 야단치는 대신 ‘봉숭아물을 들이겠느냐’고 묻는 장면도 있다.

어릴 적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여주었는데

이제 훌쩍 커버린 딸에 대한 안타까움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다.

 

추석 연휴에 가까운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봉선은 전국 어느 산이나 거의 다 있다.

개울가가 나오면 홍자색 물봉선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마침 꽃이 지고 난 자리에 달리는 꼬투리도 어느 정도 익었을 때다.

동심으로 돌아가 물봉선 꼬투리를 한번 터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김민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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